신수정
문학평론가ㆍ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올해는 눈이 흔하다. 흔하다 못해 지겨울 정도로 잦다. 설 전 쏟아진 눈보라만 하더라도 명절을 앞두고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마음이 더 심란해지도록 미친 듯이 내리고, 또 내렸다. 언론에서는 연일 폭설 피해 농가의 사정을 소개하고 어마어마한 양의 피해액을 이야기한다. 눈사태로 고립되었다가 구조되지 못한 사람들은 또 왜 이리 자주 보도되는가. 이쯤 되면 눈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 수준이다.
그런데 문학 작품 속에서 눈은 언제나 조금은 특별한 역할을 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화자는 지금 혼자 소주를 마시며 아름다운 나타샤를 기다린다. 도회지의 삶에서 별다른 행운을 맛보지 못한 사내는 어쩌면 울분을 삭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타샤와 함께 산골로 들어가 신생의 삶을 도모하기로 한다.
술집 밖으로는 계속 눈이 쌓인다. 눈은 푹푹 내리는데 온다던 나타샤는 보이지 않는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나타샤가 올까, 안 올까. 사실, 그녀가 오고 안 오고는 이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사내는 눈을 바라보며 스스로 위안을 얻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지 않는가.
이 시의 감상 포인트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리듬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라.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며 눈이 쌓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내를. 어쩌면 그에겐 한때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 가난하고 외로운 남자가 시방 눈을 들어 창밖에 내리는 눈을 응시하고 자기 삶을 되돌아보며 다시 바깥세상을 생각한다. 이 무아의 상태를 백석은 하나의 리듬으로 완성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사내의 삶은 이 대구를 따라 또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리듬이 있는 한 그의 삶은 조금은 견딜 만한 것이 될 런지도 모른다. 그는 꿈꾼다. 나타샤와 함께 하는 삶을. 그것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눈이 오고,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 괜찮은 일이다. 그리고 노래한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는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식민지 문인들이 더러 그런 경우가 많지만, 백석의 경우도 우리에게 오랫동안 잊혀진 시인이었다.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뒤 조선일보 기자,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 등을 전전하다 해방 후 북쪽에 머무는 바람에 우리 문학사의 공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 시인이 태어난 지 어느덧 백 년이 넘었다. 백 년이라, 나는 지금 백 년의 무게를 생각한다. 백 년 전 이 땅에 와서 지금 우리가 지겨워하고 있는 이 눈을 바라보았을 한 사내를. 그의 가난을, 남루를, 외로움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을 이 땅의 눈을.
눈이 그치고 봄이 오려나. 올 한 해 잦아진 눈을 치우느라 넉가래까지 구입하고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는 선배 문인 부부의 집 마당에도 이제 눈이 다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 참으로 신기하다. 그토록 지겨웠던 것도 떠난다고 생각하면 그리워진다. 그러나 그리움도 그 뿐. 이제 곧 풀이 나고 꽃이 피겠지. 그러면, 우린 또 꽃구경 가겠지. 백 년이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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