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
홍익대 BK21 메타디자인 연구 교수
‘한글 모아쓰기’와 ‘도로명주소’라니? 엉뚱한 조합도 다 있다고 여겨질지 모르겠다. 나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글자가 배열되는 공간, 그리고 건물이 배열되는 대지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수치를 도형이나 공간으로 환원하여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재배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파악하는 것은 중학교 때 자연스럽게 터득한 나의 오랜 사고 습성이었다. 이를테면 복잡한 평균값을 계산할 때는 가평균을 원점으로 둔 좌표축을 머릿속에 그린 후, 거리 차이를 서로 상쇄해 가며 답을 냈다. 그런 습성 탓인지, 나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사람들이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의 구조적인 차이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편이다.
유럽에서는 주거 공간과 도시 공간에 선형적 특성이 강하다. 주거 공간에서는 선형적인 복도의 역할이, 도시나 마을에서는 선형적인 길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진다. 그에 비해, 한국인들은 작은 구획으로 쪼개어지는 방형의 블록 단위로 지형을 인식한다. 기존 주소 표기 체계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저 멀리 고대로부터 내려온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이 동아시아인의 생활 공간 곳곳에 은연 중에 스며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땅은 사각형으로 펼쳐진다…’ 동양 전통사회에서 도시와 토지, 가옥은 이 사각형의 땅이 분할된 모델로 구획 지어졌다. 공간을 인식하는 동아시아의 고유한 문화적 형질은 여기에 연원을 둔다.
글자가 담기는 공간에도 그런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유럽인들은 한국의 원고지나 그림일기의 정사각형 구획을 보면 신기해 한다. 블록 안에 글자를 채워 넣느냐는 것이다. 중국 한자의 공간에는 방형성이 강하고, 서구 로마자의 공간에는 일렬식 선형성이 강하다. 한자처럼 음절문자의 속성을 가지면서도 로마자처럼 음소문자인 한글은 그런 면에서 무척 독특하다. 초성, 중성, 종성이 모아쓰기를 해서 사각형 공간을 이루며 음절로 결합한다. 그래서 한글은 한자보다는 선형성이 강하고, 로마자보다는 방형성이 강하다.
음절을 나누어 음소의 개념에 도달한 것은 훈민정음 창제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이다. 문자 역사의 발달 방향은 대개 음절문자에서 음소문자로 이행한다. 그런데 한글에서는 그렇게 발견한 음소들을 굳이 왜 다시 모아 써서 음절로 결합하도록 하는 것일까? 언어학적으로는, 사각형 형태의 음절로 돌아가는 것은 한자의 영향이기도 하고 한국어 형태소의 지각 단위와 일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문화적으로는, 창제 당시의 사회에서 방형을 공간의 완연한 기본 단위로 자연스럽게 인식해서이다. 사각형은 한국을 비롯한 전통 사회의 동아시아인들이 우주와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었다.
이 사각형의 틀을 깨고, 더 잘게 나뉘어진 단위인 음소 개념이 대담하게 도출되어 나왔다. 음소의 개념은 과학적 합리성과 현대성을, 사각형 공간의 음절은 동아시아 고유의 문화적 유전자를 함축한다. 음소와 음절이, 선형적이고도 방형적인 공간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는 점에서 한글의 공간 구조는 독특하고도 탁월하다. 시간 속으로 사라져가는 음성언어는 문자언어를 통해 공간화된다. 한글에는 한국인과 한국어에 꼭 맞는 공간을 글자에 마련해준 자주적 자존감이 결합 구조와 진행 방식의 차원에서도 빛난다.
지금, 우리가 몸 담은 공간에 대한 새로운 표준화가 진행되고 있다. 내년부터 ‘도로명주소’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새 주소를 알기 쉽고 명쾌하게 체계화하려는 많은 노고가 엿보인다. 선형적 공간 개념이 낯설지는 않을까 지켜보던 차에, 마침 선형식 도로명 주소를 보완하기 위한 방형적 면 개념의 ‘국가기초구역제도’와 ‘국가지점번호제도’가 함께 추진되는 모습이 보인다. 한글이 점점 로마자의 영향에 휩쓸리는 요즘, 나는 ‘글로벌’과 ‘로컬’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도록 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행정적 편의뿐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일상 공간에 뿌리내려온 고유한 습성들이 존중되고, 국제적 표준화에 더불어 한국적 특수성이 멋지게 결합되는 방식으로 도로명주소가 정착되어 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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