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과 황정민이라니. 잘 못 하면 본전도 못 찾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같이 하자는) 민식이 형 전화를 괜히 받았나 싶었죠. 그래도 이번이 아니면 그분들과 언제 같이 할 수 있겠냐는 생각에 출연을 결정했습니다."
겸손일까, 엄살일까. 20년 경력의 배우 이정재(40)는 시종일관 겸손 모드였다. 영화 '신세계' 시사 후 연기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는 "자신 없는 캐릭터였는데 최민식 선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공을 돌렸다. "연기자들이 좀 꺼리는 역할이죠. 고뇌하고 생각은 많은데 행동은 안 하는 인물. 표현할 수 있는 폭은 넓지 않은데 감정의 폭은 깊어야 하니까. 촬영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어 초반엔 자신이 없었어요."
21일 개봉하는 '신세계'에서 그는 기업형 범죄조직에 위장 잠입한 경찰 이자성을 연기했다. 조니 뎁 주연의 '도니 브래스코'와 홍콩 영화 '무간도'가 떠오르는 인물. 그러나 8년간 이어진 거짓 인생에서 벗어날 날만 기다리던 자성은 조직 내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중간 보스 정청(황정민)과 조직 수뇌부를 와해시키려는 경찰 강 과장(최민식)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
'신세계'는 '대부' '무간도' '예언자' '흑사회' 등 여러 갱스터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이라 참고가 될 법도 했지만 "그 영화들과는 인물의 주제가 달라서 도움을 받지도, 방해가 되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자성이라는 인물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선 박훈정 감독이 '신세계'의 앞뒤 이야기를 상세히 쓴 3부작의 시나리오가 도움을 줬다.
이정재는 장동건 이병헌 정우성 등 동시대 배우들과 사뭇 다른 길을 걸어 왔다. 남성 호르몬이 분출하는 '젊은 남자' '태양은 없다' 같은 영화들 사이에 '정사' '시월애' 같은 멜로도 찍었고, '오! 브라더스' '1724 기방난동사건'처럼 능청스런 코미디에도 출연했다. '이재수의 난' '인터뷰' '하녀' 등 작가주의 성향의 영화에도 자주 얼굴을 비췄다.
"당시엔 왜 이렇게 들쭉날쭉 하느냔 얘길 많이 들었어요. 나 자신을 실험하려는 게 절반이었다면 나머지 절반은 허영이었던 것 같아요. 다 해낼 수 있을 거란 착각도 있었고, 다양한 걸 해봐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죠. 좋은 경험이었지만 당시로선 영리하지 못한 선택이지 않았나 싶어요. 무난한 길을 택했으면 슬럼프 없이 잘 살아왔을 텐데 말이죠."
한때 연기 활동을 쉬면서까지 사업에 몰두한 적도 있지만 이젠 연기에만 전념할 생각이라고 했다. '트리플'(2009) 이후 중단한 드라마 출연도 고려 중이다. 얼마 전 우연히 들른 식당 아주머니에게 "요즘 왜 이렇게 활동을 안 하냐"는 말을 듣고 생각을 고쳐 먹었단다.
'도둑들'을 거쳐 '신세계'를 만난 그는 요즘 송강호와 함께 '관상'을 찍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활짝 웃는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한번쯤 의욕 있게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성공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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