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면서 협동조합 설립 붐이 일고 있다. 법 시행 두 달이 안 됐지만 벌써 전국에서 200개 가까운 협동조합이 생겼다. 5명 이상이면 누구나 금융과 보험업을 뺀 모든 분야에서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게 된 덕분이다. 대리운전 기사들이 공동 콜센터를 운영하는 협동조합, 이주노동자들의 급식과 인력 중계 사업을 하는 협동조합, 한 동네 주민들이 운영하는 북카페 협동조합 등 다양한 협동조합이 등장했다. 문화예술인들도 협동조합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연극, 미술, 출판, 독립영화, 대중음악, 예술교육 등 여러 영역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3년 문화계를 이끌 10대 트렌드 중 하나로 협동조합을 꼽았다.
문화예술인들이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는 것은 협동조합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예술로 먹고 살기 힘든 현실을 혼자 힘으로 돌파하기는 어렵고, 단체를 만든다 해도 지속하기 힘든 여건을 협동조합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출자액에 상관없이 1인 1표로 운영하는 민주적 공동체라는 점에서, 자율과 창의를 중시하는 문화예술 활동에 잘 맞을 거라는 판단도 깔려 있다.
가난한 연극인들, 협동조합에서 돌파구를 찾다
지난달 서울연극협회 회장으로 재선된 연출가 박장렬씨는 연극인 협동조합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3월 설립을 목표로 추진 중인 협동조합'고인돌 연극농장'은 식당 운영, 연극 교육, 공연 홍보물 인쇄 등의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300명을 목표로 조합원을 모으고 있는데, 배우 남명렬, 극작가 선욱현, 연출가 김태수 등 100여명이 동참했다. 서울연극협회는 돈 때문에 아파도 병원 가기를 꺼리는 연극인들에게 병원비를 대주는 의료협동조합도 검토 중이다.
박씨는 "연극인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식당은 연극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이는 문화공간으로 대학로의 명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의료협동조합도 가난한 연극인들에게 피부에 와 닿는 혜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이연극 전문 극단 즐거운사람들을 중심으로 11개 공연단체가 모인 '가족문화공동체 즐거운사람들'은 이달 중 협동조합 설립을 신고할 계획이다. 조합원은 연극, 음악, 무용, 문학 등에서 이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단체 대표들이다.
극단 즐거운사람들 대표 김병호씨는 "자생력을 갖춘 협동조합으로 서기 위해 3년 단위 사업 계획을 세웠다"고 설명했다."첫 3년 안에 자체 페스티벌을 만들려고 합니다. 조합원들이 만든 문화예술 콘텐츠를 국내외에 유통하는 시장이 되겠죠. 2차 3개년 계획은 공공극장이나 문화예술센터를 위탁 운영하는 겁니다. 전국에 지어만 놓고 놀리는 문예회관이 많은데, 거기에 콘텐츠를 제공하고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입증하려고 합니다."
인디 뮤지션들의 '독립' 선언, 자립음악생산조합
인디 뮤지션들의 자립음악생산조합은 2010년 5월 강제 철거 위기에 몰린 홍대 앞 작은 칼국수집 두리반을 지키기 위해 모였던 음악인들이 뭉쳤다. 홍대 앞의 '독립' 음악인들이 사실상 자본의 힘에 밀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철거민들과 다를 바 없다는 자각에서 시작했다.
2011년 8월 창립총회를 시점으로 1인 프로젝트 밴드 회기동 단편선의 박종윤, 밤섬해적단의 권용만, 아마츄어증폭기의 한받, 기타리스트 하헌진, 밴드 404의 정세현 등 20여명이 힘을 모아 출발했다. 아직 출자금을 모으지는 못했고, 월 5,000원 회비를 내는 회원으로 160여명이 가입했다. 초기에는 음악인 위주였지만 지금은 관객을 포함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조직으로 바뀌었다.
조합의 대표는 없는 대신 10명 내외의 운영위원회가 있다. 조합원들의 회비와 공연 등을 통해 얻은 수익은 주로 조합원들의 음반 제작(최대 50만원)에 쓴다. 하헌진, 404등의 10여 장의 음반이 자립음악생산조합의 도움을 받아 제작됐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은 아직 맹아 단계다. 시급한 문제는 조합 사무는 물론 합주나 공연 등의 음악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박종윤씨는 "인디 레이블도 이윤을 내지 못하면 운영이 힘들다. 우리는 레이블보다 자율성이 높으면서도 시스템을 갖추고 싶었고 그것이 협동조합 활동이 아닐까 생각했다. 앞으로는 우리만의 공간을 만든다거나 우리의 음악을 알릴 수 있는 채널을 넓히는 등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단계로 올라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출판, 미술, 디자인… 협동조합의 확산
국내에서 문화예술 협동조합은 걸음마도 제대로 안 뗀 상태다. 하지만 관심은 매우 높아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조직이 생길 전망이다.
전자책 출판사 더 키친의 김경덕 대표는 1인 출판사의 한계를 느끼고 작가 협동조합을 추진하게 됐다. 전자책 등 다양한 형태의 출판물을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조직이다. 그는 "혼자 출판사를 운영해보니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이 절실했다"며 "300명 정도로 조합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데, 1인 출판사들이 특히 적극적"이라고 전했다. 작가와 작가 지망생, 번역가, 출판사, 관련 분야 종사자 등에게 출자를 받아 3월 말께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 등록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서울 문래동 철공소 거리에 입주한 미술작가 등 예술가들은 협동조합 '문래예술공단'을 만들려고 한창 바쁘다. 이 곳은 10여 년 전부터 젊은 예술가들이 하나 둘 들어와 지금은 80여개의 작업실, 200여 명의 예술인들이 활동하는 예술인마을이 됐다. 품앗이와 협동으로 예술가와 주민이 주인이 되는 공동체를 꾸릴 기반으로 협동조합을 추진하고 있다.
2011년 설립된 '소셜 크리에이티브'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들의 협동조합이다.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를 연결해 디자이너는 일감을 찾고 기업은 디자이너를 구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아직 구체화하지는 않았지만 만화작가 협동조합, 독립영화 협동조합 등도 태동을 시작했다. 정부와 서울시 등 각 지방자치단체가 협동조합 육성을 다짐하고 있어 협동조합은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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