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녀자연쇄살인사건이었던가, 아동성범죄사건이었던가 세간이 한창 떠들썩하던 몇 년 전 어느 날, K와 나는 길 건너 고층건물의 통유리 승강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모난 상자가 부지런히 사람들을 위아래로 실어나르는 광경이 환히 보였다. K가 입을 열었다. "모든 엘리베이터가 저렇게 투명했으면 좋겠어."
당시 K는 삼십대 중반의 싱글남. "싱글남? 요즘 같은 땐 다 개소리야. 그냥 퀴퀴한 노총각아저씨라니까. 그것만으로도 수상한 존재인 거야. 엘리베이터에 여자나 아이랑 둘이 타게 되면 잠재적 범죄자가 되는 기분이야. 이제는 내가 피해. 급해서 꼭 같이 타야 할 땐 CC카메라에 잘 비치도록 한쪽 모서리에 바싹 붙어서곤 해."
그때는 대강 흘려들었던 K의 푸념이 다시 뇌리에 떠오른 건 '더 헌트'라는 영화를 보면서였다. 아동성추행범으로 오해받아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동네사람들에게 왕따와 폭행을 당하는 남자의 이야기. 남자는 결백하지만 졸지에 변태아저씨로 몰려 모든 것을 잃는다.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 그러나 주위사람들 입장으로서야 그 결백을 어찌 덥석 믿을 수 있으리. 증거가 없어도, 만에 하나 우리 애를 건드렸을 수 있는데? 그런 잡놈이라면 어쩔 건데? 나라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남자들, 이 세상에 종종 있겠지. K는 이제 결혼해서 두 딸의 아빠가 되어 있다. 그가 이 영화를 보면 어떤 마음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김도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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