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수는 축복받은 사람들이죠.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직업이니까 좋은 춤과 안무가를 찾아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잖아요."
1998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해 2001년부터 수석무용수로 한창 주목 받던 발레리나 김세연(34)씨는 2004년 홀연 미국 보스턴발레단으로 떠났다. 이후 스위스 취리히발레단,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을 거친 그는 지난해 가을부터 스페인 국립무용단의 수석무용수로 활약 중이다.
실력 있는 한국 무용수의 외국 진출이 낯선 풍경은 아니지만 김씨처럼 여러 발레단으로 적을 옮겨 가며 활동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 만난 그는 자신의 행보를 의아하게 여기는 반응을 오히려 흥미로워했다. "외국 무용수들은 두세 달에 한 번씩 소속 단체를 바꾸는 일도 있는걸요. 훌륭한 안무가의 매력적인 작품을 찾아 옮겨 다녔어요. 바흐, 모차르트 음악에 고전 발레를 세련되게 녹여낸 취리히발레단 작품에 홀딱 빠졌고, 네덜란드에서는 다양한 작품을 경험할 수 있어 좋았죠. 스페인 국립무용단은 조지 발란신, 윌리엄 포사이드, 지리 킬리안 등 좋아하는 신고전주의 안무가의 작품이 많아 프리랜서로 활동하려던 계획을 접고 입단했어요."
그는 14~1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는 국립발레단의 올해 첫 정기 공연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연한다. 2년여 만의 고국 무대로, 프로코피예프 음악에 모나코 몬테카를로발레단 예술감독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현대적인 안무가 더해진 이 작품에서 줄리엣의 어머니인 마담 캐퓰렛을 맡았다.
그가 이번 무대에 서게 된 것도 "좋은 작품을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일은 전혀 수고롭지 않다"는 평소 생각 덕분이다. 단 한 명의 무용수라도 오디션 없이 무대에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마이요의 캐스팅 원칙에 따라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몬테카를로로 두 시간여를 날아가 오디션을 치렀다.
줄리엣을 자아가 강한 여성으로 표현하는 등 캐릭터 재해석이 두드러지는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마담 캐퓰렛은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갖춘 인물로 나온다. 죽은 남편 대신 가문을 이끌며 조카 티볼트를 향해서는 미묘한 애정을 드러낸다. "감정 연기가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김씨에게도 공연 직전까지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작품이다. "서양 무용수들과 함께 오래 활동하다 보니 제 표정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됐어요. 슬퍼하는 연기가 화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더군요. 내가 실제 느끼는 감정이 아닌 관객에게 전해지는 감정이 극의 흐름과 잘 맞아야죠."
"무용수로 활동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서른 중반의 나이지만 예술가로서 더 성장하고 싶은 그의 욕심은 끝이 없다. 지난해 서울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공연계의 운영 체계를 전문적으로 배워 공연 기획자로도 일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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