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사진기자가 저한테 오만과 편견에 찌든 표정을 지어달라고 하더라고요. 저 착해진 지 몇 년 됐는데. 근데 그런 표정은 어떻게 짓죠?"
1990년 사회주의자 부모의 실화를 소설화한 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가 정지아(48)씨가 두 권의 신작을 발표했다. 사회 소수자 19명을 인터뷰한 르포집 (삶창 발행)과 세 번째 소설집 (은행나무 발행)다. 영상으로 치면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만큼 다른 두 책에서 작가는 '세계를 만들고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을 향한 애정'이란 메시지를 남긴다. 5일 만난 정 씨는 "인물의 행동, 사고 구조와 패턴까지 완전히 이해해야 글을 쓰는데, 쓸 수 있는 게 내 부모와 나였다"며 "지금은 인간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역사나 사회에 대한 관심은 천형과 같이 짊어지고 태어나서 버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죠. 혁명의 시대에도 연애는 싹트고 부르주아 아들과 혁명가 딸이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게 인간이죠. 약하고 부족하고 욕심 많은 게 인간인데, 그런 인간을 품으려는 측면이 (과거 소설에는) 거의 없었죠."
소설집 에 실린 11편의 단편은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표제작 '숲의 대화'는 운학이란 노인이 아내의 유해를 뿌린 잣나무 숲에서 그 옛날 젊은 시절 동갑내기 도련님의 혼령을 만나는 이야기다. 이념을 좇아 빨치산이 된 도련님은 자신을 사모해 아기까지 가진 여자를 운학에게 보낸 뒤 산에서 죽었다. 운학은 아내와 평생 살았지만 아내의 마음은 언제나 도련님을 향했고, 죽는 순간에도 도련님과 헤어진 바위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이 소설을 비롯해 작가가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단편 '혜화동 로터리', '봄날 오후, 과부 셋' 등 소설집 빛나는 단편들에는 거의 모두 젊은 시절 빨치산 활동을 했던 기억, 거기에 얽힌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사상과 이념으로 얼룩진 노년의 인생을 반추하는 이야기들은 사회를 바꾼 것은 사상보다 인간들의 믿음과 애정이라고 말한다.
르포집 은 외국인 노동자 선원, 콜센터 상담원, 종군위안부 할머니 등 개개인의 사연을 통해 한국 사회 인권실태를 밝힌 책이다. 두 달에 한 명씩 3년간 19명을 인터뷰하고 국가인권백서, 기업 노동조합 등의 자료를 통해 사회 구조적 모순과 한계를 짚었다. 역시 "개인사를 통해 사회를 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담겼다. 정씨는 "음식배달 아르바이트생을 인터뷰하면서 '나도 꼰대였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변하는 세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나는 옳다'고 말하는 순간, 늙은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깨우치게 해준 친구라 고맙다"고 말했다.
"사회 모순을 해결하는 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요. 하지만 개인이 가진 외모, 재능, 부의 격차가 줄어드는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죠. '글재주의 격차도 줄였으면 좋겠다, 그런 과정에 내 소설, 르포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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