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동네 아저씨가 쓰러져 있어요. 의식이 없어요."
4일 오후 6시 2분쯤 경기 포천소방서에 다급한 목소리의 신고 전화가 걸려 왔다. 신고자는 포천시 내촌면에 사는 권혁율(26)씨. 권씨는 이날 오후 5시 50분쯤 회사에서 퇴근해 자신의 승용차로 삼촌댁에 가다 도로에 쓰러져 있는 이모(58)씨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커다란 건축폐기물이 떨어져 있는 줄 알고 치우려고 했지만 차에서 내려보니 권씨 집에서 불과 700m 떨어진 곳에 사는 이웃집 아저씨였다.
쓰러진 이씨의 상태를 살펴본 권씨는 크게 당황했다. 이씨는 의식도, 호흡도 없는 듯했다. 이를 전해 들은 양원주(35) 포천소방서 소방교는 "구급차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우선 심폐소생술부터 하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20대 초반 십자인대 파열로 군 면제를 받은 권씨는 심폐소생술을 배운 적도, 해본 적도 없었다.
양 소방교는 휴대전화를 통해 "차분하게 가슴에 양 손바닥을 대고 4~5㎝ 깊이로 누르고 2분간 30회씩 5번을 반복하세요"라고 알렸다.
권씨는 이씨의 가슴팍을 누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흉부 압박을 하자 이씨는 2분여 뒤 숨을 크게 토해내는 소리와 함께 '컥, 컥'하며 숨을 쉬기 시작했다. 구급차량은 신고한 지 10분쯤 뒤 현장에 도착했다. 이씨는 30분쯤 뒤 남양주시 현대병원으로 이송된 뒤 안정을 되찾았다.
권씨는 "구급차량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1년처럼 느껴졌다"며 "당시 이웃집 아저씨를 꼭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씨는 권씨에게 단순한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다. 권씨 집안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사연은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8월 권씨의 누나(당시 13세)는 친구와 함께 하굣길에 집 앞 건널목을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졸음운전을 하던 화물차 운전자가 대기 신호를 무시하고 권씨의 누나 쪽으로 돌진했다. 권씨의 누나 일행과 함께 같은 마을버스에서 내린 이씨는 순간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몸을 던져 권씨의 누나를 밀쳐냈다. 이씨는 넘어지며 무릎과 팔 등에 타박상을 입었다. 권씨 누나의 친구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씨는 앞서 1998년에 권씨 가족의 집이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전소돼 실의에 빠졌을 때 건축자재를 실어다 주며 집을 다시 짓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씨는 권씨의 필사적인 심폐소생술로 위기의 순간을 넘긴 뒤 다음날 병원에서 퇴원할 정도로 회복됐다. 이씨는 당시 자신이 키우던 소를 팔고 동네 지인들과 술자리를 가진 후 귀가하다 갑자기 의식을 잃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포천소방서 관계자는 "심장박동이 정지된 후 최초 4분 이내에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가 실시되지 않으면 뇌사나 사망에 이를 수 있다"며 "이씨로서는 천운이었다"고 말했다. 권씨는 "누나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을 도울 수 있어 흐뭇한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포천=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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