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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2월 5일] 소리와 상징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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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2월 5일] 소리와 상징의 정원

입력
2013.02.0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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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정 송순은 담양에 정자를 짓고 이렇게 노래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칸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이 시조를 읽는 요즘 사람들은 대단한 호연지기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야말로 조선 원림의 원리를 가장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행위는 집 하나다. 그러나 이 집 하나를 읽어 내기 위해서 조선 사대부들은 자기 집의 뒷산과 그 뒷산이 기대고 있는 더 큰 맥락과 그 맥락이 기원하는 곳을 다 꿰뚫고 있어야 했다. 조선의 정원은 그 맥락 속에 자리한다. 집이라는 인위와 집이 ‘깃든’ 자연에. 그리고, 그 자연과 인위의 경계에 자리한다. 그 경계에서 조선의 원림은 어떤 일을 했을까?

어떤 사람들은 정원에서 가지를 치고, 어떤 사람들은 정원에서 꽃을 가꾼다. 서구에서 정원은 사람이 일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조선의 원림(정원)은 사람이 일을 하는 곳이 아니다. 조선의 정원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정원(원림)이 일을 하는 곳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정원에서, 정원이, 자연에 깃든 집을 ‘스스로 그러한’ 자연과 연결하기 위해 철마다 일으키는 행위를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상징의 작업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 상징의 작업의 원리는 무엇일까? 조선의 사대부들은 인간의 행위를 거부하는 정원을 만들며 어떤 원리에서 그 정원을 경영했을까? 정원은 어쨌든 인간의 행위가 개입하는 장소이다. 그 개입이 어떤 의미냐 하는 것이 문제다. 조선의 정원에서 그것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정원 자체를 성리학적인 텍스트로 만드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정원에 소리를 입히는 작업이다.

정원을 성리학적인 텍스트로 꾸민다는 것은 무엇일까? 논어나 맹자를 정원 곳곳에 물리적으로 새긴다는 것일까? 물론 중국의 서안에 가면 비림(碑林)이라는 어마어마한 비석 도서관이 있다. 경전을 일일이 돌에 새겨 보관한 곳이다. 그 비림에 들어서면, 어마어마한 수십 만 권의 장서를 구비한 현대의 도서관에 들어서는 것 보다 더 큰 인간의 지식에 대한 경외를 느끼게 된다. 그것을 세세히 돌에 새겨 인류의 지식을 보관하려 한 인위의 장대함에 놀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간단하게, 어떻게 보면 참으로 호쾌하게 인위를 제거한다. 그것이 바로 사물을 언어화 하는 작업이다. 흔히 얘기하는 화육(incarnation)은 언어가 육체를 입는다는 뜻이다. 언어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화한다는 얘기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경전을 정원에 새기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자연을 그대로 들이면서 만들어진 정원에 이름을 붙이는 것. 아무렇지도 않은 돌들에 ‘관어대’니 ‘탁영반’이니 ‘관란석’이니‘난가암’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이름들은 그대로 ‘관어대’처럼 고사에서 따 온 이름이 있는가 하면, 나 에서 인용된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우연치 않게 생긴 돌들이나 연못, 그리고 지형에 자신이 추구하는 도덕적 이상을 투영했던 것이다. 유가에서는 ‘혼자 있을 때를 경계하라(愼獨)’는 말이 있다. 문득 흐트러질 때, 자신이 이름 붙인 아무렇지도 않은 바위들이 자신에게 거꾸로 들려주는 경고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늘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늘 긴장해서는 인간의 사유라는 것도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조선 원림의 또 다른 원리가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소리다. 조선의 원림은 기본적으로 소리의 정원(sound garden)이다. 집과 뒷산의 사이에 대숲을 심는 것도 그렇고, 겨울에 잎이 지지 않는 활엽수들을 뒷마당에 심어 놓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여름철 대숲을 흔들고 가는 바람은 그대로 뒤란에서 장독대를 넘어 대청을 타고 방안으로 스며든다. ‘솨솨솨아’ 이 소리는 창호지의 한껏 긴장한 밀도를 타고 방안에 공명한다. 장마 때면 낙숫물 소리, 바람이 불 때면 풍경 소리, 고요한 방안에서 삼라만상이 지고 이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겨울에는 또 어떤가? 눈이 오는 날에는 더더욱 고요한 법이다. 그 고요 속에서 마른 대숲에 싸라기 눈이 부딪히는 소리, 잎이 지지 않은 넓은 활엽수에 눈 내리는 소리, 겨울의 모든 고요를 듣는 것이다. ‘사락사락’ 오늘도 그 옛날 조선의 정원에 내리는 눈 소리를 듣는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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