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도 가고/ 그대 있던 자리에/ 곧 지워질 가벼운 나비 날갯짓처럼/ 마른 국화꽃 내음이 남았다.// 우리 체온이 어디론가 가지 못하고 끝물 안개처럼 떠도는 골목길에/ 또 잘못 들어섰다든가/ 술집 주모 목소리가 정말 편안해/ 저녁 비 흩뿌리는 도시의 얼굴 그래도 참을 만하다든가/ 그대에게 무언가 새로운 알릴 거리 생기면// 나비 날갯짓 같은 이 내음 통해 하겠네./ 나비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가서 폭풍을 낳는다고도 하지만/ 가을이 아직 남았다고 생각지는 마시게.' ('마른 국화 몇 잎'의 일부)
남자는 헤어진 '그대'와 함께 갔던 골목길로 저도 모르게 자꾸만 들어선다. 그 골목길 끝에서 그대를 떠올리지만, 그대와 함께한 가을이 아직 남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남자에게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의 고백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리움, 사랑의 기억에 관한 애도에서 비롯된다. 이렇듯 황동규(75)의 시에는 낭만적 감성과 지적 절제가 공존한다.
황동규 시인이 15번째 시집 (문학과지성사 발행)을 냈다. 죽음을 둘러싼 동양적 사유를 서정적으로 그린 시집은 역설적으로 삶의 경이를 발견하는 기쁨으로 충만하다. 30일 서교동 출판사에서 만난 시인은 "삶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이 노년에 신선(神仙) 되겠다고 하셨거든요. 인간도 예술도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경지를 바라셨는데, 전 그 반대 입장이죠. '어떤 것도 인간을 넘어서서 이루는 건 의미가 없다.' 그리고 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요. 젊었을 때 한 번 보고 지나치는 아름다운 순간을 두 번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게 노년의 기쁨이죠."
표제작 '사는 기쁨'은 이런 생각을 집약한 시다.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사람의 성숙함과 지혜로움, 자신의 분수와 능력을 알고 인정하는 이의 자족감과 겸손함, 노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태도가 담겼다.
'(…)//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이 들리는 곳에서 말을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삶의 기쁨'의 일부)
시인은 "상상력은 그대로이지만 기억력은 예전만 못하다"며 최근 지방 강연을 절반으로 줄였다. 책 읽고 글 쓰는 데 시간이 두세 배 더 걸리기 때문이란다. 그는 이번 시집 도처에서 늙은 몸에 대해, 인생의 종점을 눈앞에 둔 처지에 대해 말한다. "시 한편 쓸 때 과거의 내 삶이 다 맞물린다"는 시인의 말처럼 구체적인 일상을 시로 형상화해 시인의 삶을 반추한다. 시인은 1ㆍ4후퇴 직후 힘겹던 유년시절의 기억('소년행' '소년의 끝'), 마종기 이가림 시인과 함께한 여행('버려진 소금밭에서' '산도림'), 1년여 전 2미터 축대에서 떨어져 골반과 척추를 다친 후 느낀 감회('허공에 기대게!') 등을 단정한 가락으로 들려준다.
"시를 쓰다 보면 시가 나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시가 가진 기본적인 요소가 있잖아요. 시적인 정의가 있어야 하고,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고, 세계를 생각하고,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있어야 하고. 시와 대화하다 보면 내가 시한테 배우는 거죠."
시를 통해 일군 긍정적 삶의 태도는 시인의 실제 삶과도 연결되는 듯했다. 시인은 "하강(삶과 사랑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절제)을 인정하면 상승(삶과 사랑에 대한 긍정)에 가까워진다"며 "시의 긴장이 떨어지면 언제든 그만 쓸 생각"이라도 말했다.
"과거의 내 시를 좀먹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근데 요즘 쓰는 시가 이 시집에 쓴 시하고는 또 달라서 아직 한 권은 더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하하"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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