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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2월 2일] 묵은세배의 깊은 뜻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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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2월 2일] 묵은세배의 깊은 뜻을 기억하며

입력
2013.02.0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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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 섣달그믐, 내일이면 설날이라 들떠있는데 편찮으셨던 아버지는 동네의 어떤 집에 세배를 다녀오라셨다. 뜬금없이 세배라니. 툴툴대며 나가려는데 봉투를 주시며 세뱃돈으로 전하라니 어린 마음에 좀 황당했다. 그게 내 유일한 섣달그믐날 세배였다. 그걸 묵은세배라고 하는 걸 나중에 알았다.

섣달그믐에 묵은세배를 보기란 이제는 어렵다. 처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거추장스럽다는 핑계로 건너뛰다가 이젠 아예 그런 낱말조차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일제 이후 강요된 신정 과세로 인해 묵은세배는 망년회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풍이 엄한 집에서는 사당에 모여 구세배니 그믐세배를 했다지만, 대개는 그저 동네 어른 찾아다니며 간단하게 세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화로 마을공동체는 붕괴되고 모두가 정신없이 살면서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그저 ‘까치 까치 설날은’이라는 동요로만 남았다. 그나마도 그게 무슨 날인지조차도 모른 채.

아이들에게 까치설날, 즉 섣달그믐은 설빔(요즘은 아예 이런 낱말조차 무의미해졌지만)을 처음 입을 수 있는 날이어서, 그리고 미리 장만하는 설음식 미리 슬쩍 맛보는 풍요로움 때문에 즐겁긴 했다. 어린 마음에 묵은세배는 매력 없었다. 세뱃돈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묵은세배를 하면서 따로 봉투를 마련하며 동네를 다녔다. 그 해 섣달그믐에는 편찮으셔서 내게 심부름 겸 묵은세배를 시키셨음을 나중에 알았다. 왜 우리에겐 주지 않으면서 남에겐 줄까? 야속하고 못내 아쉬웠다. 물론 다음날 우리가 받는 세뱃돈으로 상쇄되긴 했지만.

묵은세배 때 아버지가 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동네를 다녔던 까닭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 내가 당신의 나이와 겹칠 때쯤이었다. 묵은세배는 지난 한 해 덕분에 잘 지냈노라 인사하고 행복한 새해를 맞으시라 인사하고 덕담을 드리는 것이지만,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외려 명절이 자칫 서러울 이들의 살림 살피고 슬쩍 촌지를 건네는 기회이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그게 불우이웃돕기인 셈이었다. 그런 배려는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찾아온 자식들이 섣달그믐에 고향집에 도착하여 부모님께 묵은세배와 함께 형편에 맞게 마련한 돈을 드리면 그게 다음날 손자손녀들 세뱃돈이 되었다.

묵은세배는 지나온 한 해를 아쉬워하기보다 함께 살아온 한 해에 대해 감사하며 나누는 인사라는 점에서 정겹다. 하지만 진짜 살펴야 할 그 풍속의 의미와 가치는 주변의 어려운 이들의 살림살이에 눈길 나누고 마음 덜어주는 사랑이다. 묵은세배를 잊고 살면서 그런 눈길과 마음까지 작별하고 살아온 것 같아 아쉽고 부끄럽다. 묵은세배가 지녔던 조용한 배려의 마음이 그립다.

우리가 묵은세배를 하러 찾아가야 할 사람들은 누구일까? 해고의 칼바람을 피하지 못해 시린 겨울 지내야 하는 이들,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체념의 동굴로 자신을 유배시킨 노숙인들, 난방비 아까워 차가운 방에서 홀로 야윈 몸 웅크린 외로운 노인들, 취업 못한 청춘들, 돌봐줄 이 없어 외려 방학이 서러운 배고픈 아이들…그들에게 묵은세배 다니며 마음 나눈 뒤에야 설날 조상께 인사하고 내 가족들에게 덕담하고 세뱃돈을 나눠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나 살기 바쁘다고 남 살필 줄 모르고 나 잘되자고 남 짓밟는 일쯤은 대수롭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봐야 한다. 심지어 자기 회사에 다니며 열심히 일하는 이들 살림살이 나아지게 하는 일은 외면하고 그들을 감시하고 헌법에 보장된 자유로운 생각을 빌미로 마음대로 자르는 처사를 일삼는 기업들을 보면 우리가 도대체 어찌 살고 있는지, 두렵기만 하다.

동네의 어려운 이가 명절에 외려 더 마음 아픈 걸 외면하고 나만 행복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옛 어른들은 묵은세배를 통해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쳤다. 묵은세배를 잊으면서 우리가 잃고 산 것은 그런 따뜻한 마음인 것 같아 안타깝다. 나의 행복이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이뤄지는 것은 죄악이지만 남의 불행을 외면하는 나의 행복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다시 묵은세배를 통해 조금은 덜 부끄러울 수 있으면 좋겠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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