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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주인 아닌 고객으로… 길 잘못 든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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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주인 아닌 고객으로… 길 잘못 든 민주주의

입력
2013.02.01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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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치 엘리트들, 시민 참여 원치않아 대중민주주의 몰락 개인민주주의 부상9·11 테러 때 부시의 일성 시사적 "위기 직면해 국민의 본분 다하길 애국적 생각 하고 무엇보다 쇼핑하라"싸우기 전에 회피할 수 있는 시스템시민을 민주주의의 변방으로 몰고가정치 관심 갖고 '시민의 역습' 도모해야

시민이 고객으로 불리는 사회, 시민이 주권자가 아닌 자원봉사자로 전락한 사회, 대중민주주의가 아닌 개인민주주의로 전락한 사회. 민주주의의 축소라는 영문 제목을 그대로 따온 는 더 이상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을 바라지 않는 사회가 된 미국의 현재 민주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대중의 눈치를 보며 그들이 원하는 정치를 펼치기 위해 애쓰던 민주주의가 이제는 관료들의 잘 짜인 시스템 하에서 시민을 소외시키면서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했다는 문제제기로 책은 시작한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학자로 꼽히는 두 명의 교수가 집필한 이 책은 200여 년이 넘도록 서구 정치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시민의 몰락을 증언하고 있다. 나라를 일구는데 충실하게 봉사한 대가로 사회를 움직이는 중추적 역할과 정치적 권리를 얻은 시민은 투표권 외에도 법적권리와 연금 등 다양한 보상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정부가 시민의 지지와 협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대중의 정치 참여는 그 범위를 넓힐 수 있었지만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정치 시스템이 굳어진 사회에서 더 이상 국가는 시민들의 참여를 바라지 않는다. 대신 정치 엘리트들이 권력을 유지하며 행사한다. 이들은 시장, 법원, 행정절차와 기타 정치관료들에게 의존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획득한다.

9.11 테러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시민들에게 두려움을 가라 앉히고 '위기에 직면해 자신의 본분을 다하라'고 요구했다. 애국적인 생각을 하고, 무엇보다 쇼핑을 하라고 조언했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시민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이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얌전히 있는 것뿐일까. 저자는 오늘날 정치에서 시민은 이제 결제가 가능한 신용카드를 손에 쥔 존재일 뿐이라며 비관적으로 이야기 한다. 또한 정부로 하여금 어떤 역할을 하도록 압박하기보다는 자선단체나 시민단체 등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원봉사자가 되도록 유도하며 투쟁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덧붙인다.

미국에서는 일반 시민이 정치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면서 60년 이상 투표율이 하락했다. 그리고 평범한 미국인들은 시민에서 언제가부터 '고객'으로 불리게 됐다. 실제 워싱턴 정가에서 정치인들끼리 흔히 '고객'이라는 말을 쓴다. 서비스 강화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지칭어가 말해주듯 이제 정부 서비스를 받는 수혜자로서만 시민을 볼 뿐 참여의 주체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정부의 정책 역시 기업형 관점에서 고객들에게 좀 더 쾌적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력을 기울일 뿐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끌어들이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시민은 변방으로 밀렸을까. 미국에서는 이제 정치자금 모집에 있어서 더 이상 대중을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몇몇 부유한 기부자들에게 전화를 거는 식으로 그들끼리의 리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후원금을 통해 정치활동을 영위해 나가는 미국 정치인들은 정치투쟁을 통해 평범한 시민을 동원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미국에서 시행중인 학교 선택제도인 학교 바우처 시스템에서도 자녀 교육에 불만이 있을 경우 학교를 옮길 수 있다. 때문에 학교의 문제점이 발생해도 다른 부모들과 함께 연대해 항의할 필요성이 없다. 민주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미국 시스템의 경우 싸우기 전에 회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시민을 더욱 민주주의의 바깥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다수가 지배하는 대중 민주주의가 몰락하고 소수 엘리트들의 지배인 개인 민주주의가 부상하면서 과세나 선거 환경 등의 영역에서 일어난 균열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업무를 시장으로 넘기는 민영화를 이야기하며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과 하층을 우선해야 하는 공공 프로그램의 속성 자체가 다른데도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민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며 그 위험성을 지적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만만치 않은 분량에다 미국 정치 사회적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매끄럽게 넘어갈 수 있는 내용들이지만 꼼꼼한 각주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 어렵지 않다.

정치에서 시민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다면 반대로 시민의 입장에서는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축소된 권리를 다시 확대시키는 것, 그리고 정치 구성원으로 그 역할을 다해 '고객'이 아닌 '시민'이 되야 한다는 반어법일 것이다. 대중이 정치에 무관심해진 게 아니라 더 이상 정치 엘리트들이 시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현재의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경고를 보낸다. 이것은 곧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 '회심의 역습'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과 동일선상에 놓인다. 미국 현대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이 책은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 현실과도 흡사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러 부작용이 크긴 하지만 아직까지 정치에 열의가 높고 사안마다 투쟁적인 한국 사회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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