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구본주라는 조각가가 교통사고로 죽은 사건이 있었어요. 보험회사가 예술가는 무직자라며 보험금을 깎자고 해서 (미술인)백수십명이 한 대형 손해보험회사 앞에서 시위를 했죠. 제 이름과 사비나미술관 학예실장이란 직함까지 들어간 그 시위의 기사를 보고 미술관에서 이름을 빼라고 요구하더군요. 할 수 없이 언론사에 부탁해 인터넷 기사에서 이름을 삭제했는데 일주일 뒤 해고통지를 받았습니다."
큐레이터 김준기(45)씨의 7년에 걸친 싸움은 그렇게 시작했다. 사비나미술관(관장 이명옥)에서 3년 동안 여러 전시를 기획했고 그 사이 문화부 장관 표창까지 받았는데 '근무 태도 불량'을 이유로 쫓겨난 것을 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시위 참가 직후의 일이라 "그 보험사와 관련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도 항간에 떠돌았지만 김씨는 그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우선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사비나미술관의 후원회 형태로 설립돼 이명옥 관장이 대표인 사비나현대미술관회(사용자)에 대해 원직 복직과 해고 기간 임금 지급 판정을 내렸다. 이 관장은 중앙노동위에 재심을 신청했지만 중앙노동위도 김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관장은 이번에는 노동위의 판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청구가 기각되자 항소, 상고로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모두 기각 당했다.
해고 무효가 확정된 뒤 부당해고 기간 임금 지급 소송이 시작됐다. 서울지방법원이 임금 지급 판결을 내렸는데도 돈을 주지 않자 법원 집행관이 미술관 재산 압류 절차에 들어갔다. 이 관장은 미술관회와 미술관은 별개라고 이를 저지했고, 형식상으로 미술관회에서 근로자를 파견 받은 미술관이 임금 지급 의무가 있는지에 대한 소송이 다시 벌어졌다. 이번에도 김씨가 이겼지만 미술관은 또 항소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6,500만원을 지급하라"는 고등법원의 화해 권고를 뒤늦게 미술관이 받아들이면서 사건은 종결됐다.
현재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인 김씨는 이 사건을 돌이켜 "국내에서 큐레이터는 직업적인 안정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기본적인 인권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아 일어난 일"이라며 "미술계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립미술관일수록 더 심하다"고 말했다.
한국큐레이터협회(회장 윤범모)도 이 소송을 한 사립미술관 학예실장과 관장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박물관 제도의 모순과 한계를 대변'하는 사건으로 본다. 한국 미술계가 급속하게 성장해오는 과정에서 생겨난 '전문성과 윤리성의 한계'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큐레이터의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고용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계열의 유명 미술관에 비하면 사비나는 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영세한 사립미술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합당한 이유 없이 피고용자인 미술관 직원을 맘대로 쫓아낼 수는 없다. 그게 관행이었다면 한국 미술계는, 특히 미술관 경영자들은 이 사건을 환골탈태의 기회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째 개운하지 않다. 취업난을 호기로 요즘 미술관들이 너도나도 '노동력 착취형' 인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비판이 자꾸 나오는 걸 보면.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조유빈 인턴기자 (중앙대 법학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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