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일할 당시 학생의 아버지가 너무나 억울한 경우를 당했는데도 법률적 조력을 받지 못해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것을 봤다. 법조인이 되어 더 많이 사회에 공헌해야겠다는 결심을 그때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1970년대, 신문배달과 구두닦이를 하며 야간고등학교에 검정고시로 입학했던 위철환(55ㆍ사진) 신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그는 1979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되면서 자신의 인생이 안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열혈 교사였던 그는 법률 서비스를 못 받고 있는 서민들을 보면서 편한 길을 포기하고 다시 도전을 택했다.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성균관대 법대를 다니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1986년 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의 길로 들어섰다.
사시만 합격하면 어려운 사람도 돕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예상은 변호사로 개업한 첫해인 1989년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지방에도 판검사 출신 변호사만 찾는 악습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악습을 따르지 않고 정의와 도덕적 가치를 지키려다 보니 사무실 유지하기조차 어려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이때부터 학연, 지연, 전관예우로 똘똘 뭉친 법조계의 기득권 세력과 싸움을 시작했다. 수원에서 강연과 사회봉사 활동을 폭넓게 벌이던 그는 2009년 연고도 기반도 없으면서 경기중앙변호사회 회장 선거에 나섰다.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열세를 딛고 그는 18대 경기중앙회장에 당선됐고, 19대 재선에 이어 변협 회장 선거에 출마해 지난 21일 사상 최초로 실시된 직선제를 통해 1만3,000여 한국 변호사들의 수장이 됐다. 서울이 아닌 지방변호사회 출신으로는 최초의 변협 회장이다.
하지만 그의 앞에 산적한 현안은 만만치 않다. 우선 직선제 선거로 인한 조직 내분을 수습하고 2월말까지 간부진을 구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핵심적 과제는 변호사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절할지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는 변호사 수를 현재 2,500여명에서 대폭 줄일 생각을 가지고 있다. 논란이 계속지고 있는 사법시험 존치 문제에 대해서도 확실한 입장을 정했다. 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체제에서는 돈이 없으면 변호사가 되기 힘들기 때문에 사법시험을 존치하거나 예비시험제를 도입해 사회 전 계층에 법조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겠다는 것이다.
그는 "사법시험이 없었다면 나 같은 사람은 지금의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며 "나를 보고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또 다른 개천의 용이 나오려면 계층간 이동을 위한 사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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