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워싱턴의 전문직 재미동포(한인) 모임인 워싱턴 한미포럼에서 참석자들이 한국에 대한 여러 감정을 토로했다. 1903년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103년 동안 미국 한인의 역할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들이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3%까지 도와준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 가발을 다량 수입해 간 이들도 선진국 미국의 교민이었다. 베트남에서 해외 교포들이 고국에 송금하는 돈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유발되는 것이 꼭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랬던 한인들이 고국에 대해 서러움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김창준 전 연방하원의원은 한미포럼에서 한국기업들이 백인우월주의가 몸에 박혔다고 했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진출해 파트너를 선택할 때 교민은 무시하고 백인 미국인을 찾는다는 것이다. 한인이 세운 법인을 골라도 되는데 무조건 백인 회사만 고르니 그게 한국인의 백인 선호이자 자기 동포 무시가 아니면 무엇이냐는 것이다. 과거 한국의 가발을 사주었던 한인들에게 한국 기업들이 혜택은 못 줄지언정 동등한 기회는 줘야 한다는 말에 반대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한편으로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한미관계만큼이나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확인하게 된다. 적어도 한국의 경제 사정은 교민들이 도와줘야 할 단계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미국 기업이 한국말을 할 줄 알기 때문에 한인을 고용하고 교민들이 자녀 교육에서 과거 기피하던 한국말을 이제는 필수로 여길 만큼 생활 전반에서 한국의 비중은 이전과 달라졌다.
한인들이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격한 감정을 토로하는 분야는 한국의 정치다. 이들이 보기에 민주화 26년째인 한국의 정치는 여전히 후진적이다. 최근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과 정권 초기 핵심 실세였던 정두언 의원이 실형을 받은 것들이 한인들의 이런 생각을 더 굳게 만든다. 대통령 가족이 감옥에 가고 정권 실세들이 줄줄이 재판을 받는 것이 미국에는 없는 한국적 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정치 불신 때문에 한인들의 고국 걱정이 지나치다 싶을 행동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국 판 신문고인 백악관 청원운동은 대표적인 사례다. 백악관 청원사이트 ‘위 더 피플(we the people)’에 한국과 관련해 진행 중인 청원운동만 5개가 된다. 지난달 치러진 18대 한국 대통령 선거에 부정이 개입됐다며 재검표를 요구하는 청원은 서명자가 2만5,000명을 넘어 백악관이 한국 대선의 부정선거 여부를 답변해야 할 처지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대법원 판결대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촉구하는 청원까지 하는 것을 보면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미국에 사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면키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한인들에게 고국에 대한 걱정과 불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실례로 주차된 자동차가 700여대인 한인 단체 모임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 차량을 세어보니 미국 시장 점유율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대인 것에 놀란 적이 있다.
한국에 대한 걱정과 서러움, 또 불신이 커질수록 한인들이 미국 사회 내부에서 고국의 이익이나 민족의 장래를 대변하려는 의욕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반대로 이들이 한국에 대한 소모적 감정 대신 미국 사회에서 한국의 이해관계를 위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는 한국의 자산이 될 것이다. 미국에서 지켜볼 때 한미관계가 중국, 일본에 비해 여전히 주변적인 것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지난해 미국 연방센서스가 공개한 한인은 170만 6,822명이나 된다. 이민사 100년이 넘은 지금 한국의 정치는 이들이 재외국민 선거용 표가 아니라 한미관계에서 장차 중요한 언덕이 될 수 있도록 고민을 해야 한다.
이태규 워싱턴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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