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지나온 길의 끝자리이면서 동시에 나아가야 할 길의 첫자리오늘과 내일의 비관·낙관이 공존 반성도 하고 희망의 의지 다져낯선 앞길에 종종 주눅도 들지만 야릇한 설렘 동반 동력을 얻기도
예년보다 춥고 눈이 많이 내려선지 올 겨울엔 빙판길도 유난히 많다. 미끄러운 길 위에서 엉거주춤 걷다 보면 시린 손 호주머니에 넣을 엄두도 못 낸다. 어쩌다 기우뚱 미끄러지기라도 한 뒤라면 움직임은 더 위축되기 마련. 엉덩이는 한껏 뒤로 빠지고 두 팔은 허우적거리며 유사시를 예비하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전방을 살피고 발 디딜 곳을 탐색하느라 고갯짓도 바빠지고, 살짝 경사라도 있는 길이라면 비척비척 식은땀이 날 수도 있다. 낙상의 낭패를 면하자니 꼴이고 체면이고 없고, 당장엔 추운 줄도 모른다. 잠시지만 우리는 사지육신의 존재가 된다. 지능이나 지혜보다는 머리의 무게와 각도가 문제이고, 재간이 아닌 감각과 순발력이 관건이 된다. 사실 그 상황에 이르면 이런저런 이성적 계산을 해볼 엄두가 안 난다. 직립보행이라는 진화의 위업은 어이없이 부인 당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더불어 초라해진다. 그 때의 빙판길은 일상의 균열이고 과장하자면 문명의 균열이다. 익숙한 편리와 당연한 이기(利器)의 사소한 결핍 앞에, 오직 육체적 존재로 방비 없이 서야 하는 자리, 인간의 생물학적 열등함을 절감하는 자리다.
'지금, 여기'는 어떤 판단과 선택의 순간에, 당위로 이끌리기 쉬운 마음을 냉엄한 현실 과 대면케 하는 말이다. 한 문학비평가가 처음 썼다는 저 수사의 선언적 비장함은, 낙관이나 비관으로 어물쩍 편향하려는 마음을 간신히 중심 잡게 하고, 긍정이나 부정으로 쉽게 미끄러지려는 관성의 멱살을 틀어쥐고 다시 텍스트를, 맥락을 들여다보게끔 하는 힘을 지닌다. 우리는 저 말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공간으로서의 '지금, 여기'는 지나온 길의 끝자리이면서 나아가야 할 길의 첫 자리다. 그 곳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휘청거리며 등 떠밀리는 자리이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안정의 궤도를 벗어나 낯선 국면으로 진입해야 하는 자리다. 그 자리가 우리의 기대나 욕심처럼 늘 우호적이기는 힘들다. 그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본성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잠시 놓았다 다시 짊어지는 삶의 무게는 늘 버겁고, 오리무중의 앞길은 우리를 주눅들게 한다.
순간의 형태로 돌진해오는 숱한 '지금, 여기'의 연쇄로서의 일상은, 그래서 그리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 곳은 (과거에의)부정과 (미래에의)긍정이 안간힘으로 맞서고 오늘과 내일의 비관과 낙관이 불안하게 공존하는, 이 겨울의 빙판길처럼 미끄럽고 불안정한 공간이다. 그 미끄러움은 물론 난관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 미끄러움으로 하여 '지금, 여기'에서 발을 떼게도 된다. 그 자리는, 맨틀의 대류와 상관없이, 얄궂은 시간 속에서 어떻게든 흔들리는, 동적인 공간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지금껏 감당해온 결핍의 현실과, 또 새롭게 감당해야 할 시련의 맥락들을 쓰린 마음으로 확인하고 수긍하면서, 회한과 반성의 반동으로 다짐도 하고 의지도 품는다.
빙판길의 끝에 만나는 미끄럽지도 질척거리지도 않은 길은 묘한 안도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긴장의 아드레날린이 잦아들면서 부리는 재작 같은 것일지 모르지만, 그 느낌은 작은 모험의 여운처럼 우리를 미약하게나마 흥분시키고, 불쑥불쑥 치미는 삶에 대한 막연한 불안 혹은 두려움에 맞설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그것은 '다 지나간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이를테면 사소한 격려다. 하루치의 고된 산행을 끝낸 뒤 깃들이는 쉼터의 아늑함과 달리, 너무 미미해서 스스로도 알아채기 힘든 격려. 그것은 무더위 속에 착각인 듯 느껴지는 미풍 같은 활력이다.
그런 어렴풋한 긍정적인 기운에 젖어, 우리는 비로소 상체를 세워 긴장된 허리 근육을 풀고, 말려 올라간 외투의 밑단을 가다듬고 흔들리던 시선을 다잡는다. 우리는 다시 익숙한 일상의 공간으로 진입하고,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위엄을 거짓말처럼 회복한다.
개인 차는 있겠으나, 안정을 바라는 마음은 변화에의 욕망보다 질기고 힘 센 본능인 듯하다. 울퉁불퉁 덜컹거리는 너덜길보다 잔디나 우레탄 깔린 산책로로 끌리기 쉬운 발길처럼, 문명이 닦아온 편리의 대로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시도일지라도 모종의 의지나 강제적 개입, 이를테면 빙판길 같은 비일상의 새로움, 외적 자극이 필요하다. 무의식의 저변에 깔린 망각의 무엇이 익숙한 듯 낯설게 꿈의 공간을 헤집고 선연히 떠올라 우리의 심상한 새벽을 심란하게 하는 데는 그 꿈이 굳이 악몽일 필요까진 없는 법이다. 우리 안의 낯선 우리와 대면하는 드물지 않은 경험은, 새롭게 환기되는 '지금, 여기'의 자극처럼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그 변화는 새벽잠 설친 하루처럼 불편하지만, 무료한 일상의 균열에서 오는 야릇한 설렘도 동반한다. 이를테면 그런 것도 우리를 안정과 편리의 관성에 맞서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그 때 환기되는 '지금, 여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부정적일수록 변화에의 가능성은 커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흔히 보수, 진보라는 말로 경계나 경향을 상정하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지금, 여기'에 대한 인식의 편향에서 파생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분배나 성장, 현실의 정의나 윤리에 대한 판단의 엇갈림은 저 편향을 지탱하는 주요 요소들일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당초의 바람이나 기획을 배반할 때가 많고, 배반의 후유증은 '멘붕'의 무기력으로, 혹은 비관이나 냉소로 앙금처럼 남아 변화의 동력 자체를 잠식하기도 한다. 진보는, 그것이 내면의 한 작용이든 집단의 힘이든, 늘 그렇게 힘겨운 소수로 바둥거리면서 예외적으로만 다수의 자리를 획득하는 것은 아닌지.
미끄러운 빙판 위의 우리는 갓 걸음마 시작한 아이처럼 약하고 불안정한 존재이지만, 한편으로 그 불안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혼신을 다하는 아이의 열정과 집중력을 회복한다. 미끄러져 몸과 마음을 상하는 일도 있고, 흔들리면서도 더디게 헤쳐 나온 기억과 작은 성취의 짜릿함으로 또 낯선 듯 익숙한 꿈의 새벽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 동력은 아마 '지금, 여기'의 이 빙판길처럼 불안하고 동적인 공간 속에 있고, 저마다의 '지금, 여기'를 살피고 내면화하는 마음 안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일 지 모른다는 억지스러운 희망을 우리는 '지금, 여기'의 미끄러움 위에서, 미끄러짐을 통해 확인하기도 하는 것이다.
연재를 끝내며
게토의 유대인들은 허락된 삶의 공간을(당연히 주검의 공간도) 확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덤 위에 다시 시신을 묻어, 수 세기 동안 층층이 봉분을 쌓였고 비석들도 등을 맞대다시피 빼곡했다고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신작 는 중세 동판화에 묘사된 체코 프라하의 한 음산한 유대인 공동묘지를 '음모'의 공간적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음모 서사의 생성 및 확산구조를 공간적으로 시각화한다. 에코는 아마도, 저 공간의 이미지에서 자신이 글로 쓰고 싶던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귀띔 받았을 것이다.
어떤 공간은 그렇게, 수줍게 혹은 대담하게, 우리에게 말을 건다. 공간을 낯설게 살피고 공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처음엔 조금 성가실지 모르지만, 의외의 것들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부대낌의 사연과 하소연들, 잊힌 시간 속의 '나', 그리고 어떤 인연들….
그 시도는 책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내가 모르는 나와 너무 잘 안다고 여겼던 작은 세상들을 새롭게 알아가는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침묵으로만 교감되는 어떤 본질에 다가서는 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설프게나마 그런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선임기자 proose@hk.co.kr
최흥수기자 choissu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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