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3월 31일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티베트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던 마흔세 살의 아웅산 수치는 고국 버마(미얀마)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평범한 주부였던 그의 일생은 물론 조국 버마의 역사도 송두리째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아웅산 수치는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로 두 살 때 아버지가 암살됐다. 인도와 영국에서 성장한 그는 그 해 4월 귀국해 영국 및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 군부 일당 독재로 피폐해진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목도한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8일 벌어진 시위에서 군부의 무차별 발포로 수 천 명이 사망한'8888민주화 항쟁'사태가 벌어지자 마침내 반독재 투쟁의 최전선에 선다. 1988년 8월 26일 버마의 수도인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 앞에서 100만 명의 시민이 몰려든 가운데 그가 진행한 대중연설이 대장정의 시작이었다."제 본능이'지금은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외칠 수 없는 시대야''아버지의 딸로서 정치에 뛰어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국 일간지'인디펜던트'의 기자로 20년 넘게 활동한 피터 폽햄(Peter Popham)은 아웅산 수치 여사의 일생을 추적한다. 버마 민주화 운동을 이끈 공로로 두 번에 걸쳐 노벨 평화상 수상했으며'철의 난초'여성 만델라'등으로 불리는 아웅산 수치가 주부에서 버마 민주주의민족동맹을 이끄는 투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치밀하게 쫓는다. 비밀리에 버마에 수 차례 입국해 아웅산 수치 주변인을 만나고 그가 연금에서 풀려난 뒤는 두 번에 걸쳐 인터뷰를 한 끝에 완성된 이 평전은 버마 민주화의 긴 여정에 대한 연대기이자 극한 고통 속에서 각성해가는 한 인간의 성장을 그린 관찰기다.
그러기에 이 책은 많은 부분을 아웅산 수치가 1989년 7월 21일 이후 군부에 의해 15년에 걸쳐 2,180일 동안 가택 연금 됐던'고통의 시절'에 초점을 맞춘다. 1989년 당시 집권세력인 군부는 아웅산 장군 시절 쓰던 국호인'버마'를 '미얀마'로 변경할 정도로 아웅산 수치를 견제했다. 이런 군부와 한치도 타협하지 않는 여장부였지만 그는 동시에 영국에 남겨진 두 자녀와 남편을 가슴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엄마이자 아내였다. 동네 아이들의 셔츠를 꿰매주다 두 아들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고 전립선 암에 걸린 남편의 임종조차 지킬 수 없는 현실 앞에서는 슬픔에 잠긴다.
그러나 그는 좌절 대신 스스로를 제련하는 힘을 찾는다."고통 너머에 희망의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고, 고통의 연속으로 점철된 길을 밟고 가야 했던 사람 중에는 역경과 고난 속에서 오히려 잠재력을 극대화한 경우가 있습니다. 승리란 삶에서 겪을 수 밖에 없는 가장 혹독한 시련을 통해 무언가를 배운 사람에게 보장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15년의 세월 동안 그는 더 부드러워졌고 또 강해졌다. 불교의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그의 정치 사상도 바로 이때 개화했다. 이는 매일 새벽 하루 일과를 버마 불교의 전통적 명상 방법인 위빠싸나로 시작하며 내면을 들여다본 결과물이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아웅산 수치의 일대기를 다룬 뤽 베송 감독 영화'더 레이디'에 이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이 평전을 통해 우리는'민주화 운동가'란 외피에 가려진 한 여인의 생애를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현재 버마 최대 야당인'버마 민주주의민족동맹'을 이끌고 있는 아웅산 수치 여사는'2013년 평창 스페셜 올림픽 세계대회'개막식 참석을 위해 29일 한국을 첫 방문한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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