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 이 과장의 출퇴근 하루
구수한 커피향이 코끝을 스쳤다. 나른한 오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아메리카노가 분주한 사무실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주는가 싶었는데, 환경부 이지은(가명) 과장은 잔에 담은 커피를 벌컥 벌컥 들이켰다. 오늘만 벌써 4잔째. 과천에서 세종청사로 옮긴 뒤 마시는 커피 양이 2배 늘었다. 이 과장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쌓인 출퇴근 피로와 졸음을 쫓아내려고 바쁜 와중에도 자주 커피를 찾게 된다”고 했다.
그의 출근길은 꼭두새벽부터 시작된다. 이 과장은 22일에도 어김없이 새벽 5시경 일어났다. 준비시간이 빠듯해 아침은 전날 쪄놓은 고구마로 때웠다. 경기 용인시에 위치한 집에서 통근버스가 있는 정자역까진 10㎞ 남짓, 차로 25분 거리.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난 남편이 데려다 주면 편도 110㎞, 매일 치러야 하는 ‘출퇴근 오디세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날 오전 6시 45분 정자역 1번 출구. 세종청사행 45인승 버스 3대가 덜그렁 소리를 내며 손님을 맞이했다. 연초만 해도 앉을 자리가 모자랐던 좌석은 이제 절반 정도만 찼다. 이 과장은 “우리 부서만 해도 처음엔 15명 중 절반 이상이 서울ㆍ수도권에서 통근했지만 지금은 나 혼자”라고 했다. 나머지 직원들은 세종시와 그 인근에 집을 구했다. 출퇴근 여독(旅毒)에 지친 탓이다.
버스는 오전 7시에 출발했다. 모두가 잠든 적막한 버스 안에선 간간이 코고는 소리만 들렸다. 목도리를 꽁꽁 싸맨 이 과장 역시 버스에 오른 지 얼마 안 돼 피곤한 듯 깊은 잠에 들었다. 버스는 오전 8시20분경 세종청사에 도착했다. 일어나 출근 준비한 지 3시간 만이다.
이 과장은 지난해 12월 26일부터 세종청사에서 업무를 봤다. 지금까지 집에 가지 않은 건 두 번. “업무가 쌓였는데 출퇴근길에 5시간을 버리는 게 너무 아까워서”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책상 한 켠에는 세면도구, 기초화장품, 옷 한 벌이 마련돼 있다. 부처 내 수면실에서 잠을 청할 경우를 대비한 나름의 생존법이다.
하마터면 이날도 청사에서 밤을 지새울 뻔 했다. 그가 퇴근길 양재행 버스에 오른 건 저녁 8시 56분. 통근버스 마지막 출발시각(9시)을 아슬아슬하게 맞췄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국회 상정 법안과 관련한 내부 보고서를 검토하다가 헐레벌떡 뛰어왔어요. 당일 업무를 못 끝냈는데도 버스 출발시각에 맞춰 나와야 하니 업무에 집중하기가 참 어렵네요.” 환경부에선 직원들의 퇴근길을 배려해 ‘오후 4시 이후에는 업무 지시를 하지 마라’, ‘오후 5시 넘으면 회의를 소집하지 마라’는 장관 지침이 과장급에게 내려왔을 정도다.
버스는 칠흙 같은 어둠을 뚫고 빠르게 내달렸다. 경부고속도로 죽전정류장에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오니 밤 11시다. “지금은 겨우겨우 버티고 있지만 2, 3달 후에도 이런 식으로 출퇴근 전쟁을 치를 자신은 없어요. 자식 결혼 시키고 남편과 둘이 사는데, 직장이 서울인 남편 남겨두고 혼자 내려가 살 수도 없는 노릇이라 힘드네요.” 버스로 5시간, 230㎞ 출퇴근길을 마친 그는 녹초가 돼 있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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