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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맛 씁쓸한 컵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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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맛 씁쓸한 컵밥

입력
2013.01.24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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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밥’의 고향은 서울 노량진 고시촌이다. 종이컵에 밥류를 넣어 선 채로 1~2분만에 먹을 수 있는 컵밥은 시간도 돈도 없는 고시생들에겐 안성맞춤의 한끼 식사였다. 컵밥을 먹는 고시생이나, 컵밥을 파는 노점상이나 한국사회 애환의 단면이었다.

하지만 ‘시장’엔 언제나 갈등이 따르는 법. ‘컵밥 시장’이 커지자 손님을 빼앗긴 인근 상가식당들이 들고 일어났고, 노점상들은 강제철거 위기를 맞고 있다. 양쪽 모두 생존이 걸린 ‘서민 대 서민’의 갈등인 셈이다.

현재 컵밥은 대형마트나 편의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노량진 컵밥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자 대기업들이 발빠르게 제품화한 것이다. 아이디어를 상품으로 연결시킨 기업을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영세한 원조(노량진 노점상)는 사라지고 이를 흉내 낸 대기업만 살아남게 된 쓸쓸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원조 노량진 노점상 철거 당하고"컵밥 탓에 가게 문닫을 판" 인근 식당주인들 민원 빗발구청 "이달내 자진정비하라" 순차적으로 강제철거 나서

"한 그릇에 2,500원하는 컵밥 팔아서 매일 돌아오는 일수 막기도 벅찬데 이렇게 철거를 하면 죽으란 소리 아닌가요."

24일 오후 서울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 골목 입구에서 만난 노점상 김모(45)씨는 울분을 토했다. 전날 새벽 동작구청의 강제정비로 인해 폐허가 된 노점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은 김씨는 식어가는 어묵 한 그릇으로 추위를 달래며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었다. 김씨는 "자리 비웠을 때 구청이 화분이라도 놔 버리면 다시는 못 돌아올 것 아니냐"며 "절대로 못 비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작구청이 지난해 4월에 이어 9개 여월 만에 노량진 학원가의 컵밥 노점 등 5군데에 대한 강제정비에 나서면서 노점상과 인근 상인들 간의 '컵밥 전쟁'이 재점화 하고 있다. 노점들이 달랑 2,500원에 김치볶음밥부터 오므라이스까지 다양한 메뉴를 컵에 담아 팔기 시작한 것은 약 4년 전. 고단한 주머니 사정과 포장마차에 서서 10분이면 먹을 수 있는 간편함 때문에 고시생들이 컵밥 노점에 몰려들면서 인근 음식점주들과 노점상인들간의 악연은 시작됐다.

인근 상가 주인들은 길 바닥에 나 앉은 노점상들 못지 않게 '생존권 사수'를 외치며 구청 측에 노점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강제정비 된 노점상과 같은 골목에 자리잡은 한 음식점 주인은 이날"월세도 빠듯한데 컵밥 노점에 손님 다 뺏기고 가게 문 닫을 판"이라며 "도로를 점령하고, 세금도 안 내고, 맨날 현금 장사하는 노점은 당연히 철거돼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특히 동작구청이 올 1월부터 시행하기로 한 노량진 학원가 일대의 '명품거리' 조성사업이 예산 부족으로 중단되면서 노점상 철거를 기대했던 인근 상인들의 항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동작구 관계자는 "한동안 민원이 뜸했는데 최근 들어서 당장 철거 하라는 욕설 섞인 전화나 서면 민원이 쏟아지고 있다"며 "3주전에는 상가 주인 2명이 직접 찾아와 항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작구청은 현재 노량진 학원가에 있는 50여 군데의 노점상에 '31일까지 자진정비 하라'는 공문을 전달한 상태다. 구청 건설관리과 관계자는 "상가 주인들이 정당한 민원을 제기해 집행을 안 할 수가 없다"며 "노점상들에게 최대한 자진정비를 권하겠지만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순차적으로 강제정비에 나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벤치마킹한 기업들 너도나도 출시편의점·프랜차이즈 업체들 컵라면·삼각김밥처럼 상업화'재벌 컵밥' 비판 속에서도 새로운 간편식으로 자리잡아

컵밥을 처음으로 제품화한 곳은 작년 4월 편의점 GS25이다. 이후 여러 기업들이 컵밥 제품을 출시했다. 중소기업 컵밥 프랜차이즈도 등장했고, 가공식품업체도 컵밥을 출시하는 등 상업화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현재 국내 대형편의점 3사 중 CU를 제외한, GS25와 세븐일레븐에선 컵밥을 판매하고 있다. GS25의 컵밥은 노량진 노점상보다도 싼 1,950원으로, 밥과 비엔나소시지와 어묵 등을 소스에 비벼 먹는 식이다.

출시 때부터 논란은 있었다. 인터넷 등에선 '대기업이 노점상 고객까지 노린다'는 이른바 '재벌 컵밥'비판이 제기됐다. GS25 관계자는 "초창기 논란이 되자 가맹점주들이 발주를 꺼렸고 지금도 도시락 매출 중 최하위"라고 전했다.

하지만 논란을 통해 오히려 컵밥이라는 제품이 널리 알려졌고, 노량진 고시촌을 넘어 전국 각지의 길거리 음식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지지고' '오컵스' 등 컵밥 전문 프랜차이즈 업체까지 생겨났고, 기존 프랜차이즈 식당 중에서도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컵밥 메뉴를 테이크아웃 용으로 추가하는 곳이 늘었다.

지난해 9월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길거리에서 컵밥을 먹은 것도 컵밥 인기에 일조했다. 1인 가구가 늘어나고, 불황으로 호주머니마저 가벼워지면서 컵밥은 삼각癰? 오니기리, 컵라면, 도시락 등과 함께 '편의점 간편식'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컵밥 바람이 확산되자 세븐일레븐은 지난해 11월 '전통비빔컵밥'과 '참치마요컵밥'을 1,700원에 출시했다. GS25의 사례를 의식해서인지 '조용히' 출시했다. 식품업체인 비락도 지난달 컵라면처럼 물을 부은 뒤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비락 즉석컵밥'을 2,200원에 내놓았다. 노점상보다도 싼 값에 내놓을 수 있었던 건 역시 대기업 특유의 '규모의 경제'때문이었다.

기업들은 컵밥 얘기가 거론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특히 노량진 노점상 철거문제가 나오자 곤혹스럽다는 반응이다. 한 관계자는 "기업은 길거리에서든 식당에서든 어디에서나 아이디어를 얻고 토론과 시장조사를 통해 이를 제품화한다"면서 "컵밥도 그런 간편식의 하나였는데 마치 노점상 메뉴를 대기업이 훔친 것같이 비춰져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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