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출판사는 외국 문학작품의 번역서를 펴낼 때 해당 전문가의 감수를 꼭 거친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자주 격론이 벌어진다. 그런데 하나의 오역이라도 없애려는 이런 힘겨운 노력이 어느 순간부터 물거품이 되고 있다. A출판사가 펴낸 책을 B출판사가 적당히 윤문해 출판한다. 다시 C를 비롯한 수많은 출판사가 B출판사의 책을 복제하다시피 출판한다. 수많은 출판사들은 전혀 양심에 꺼리지 않는다. 왜냐고? 베낀 것을 베낀 것에 불과하니까.
과거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건전한 상식과 안목을 갖춘 서점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팔 만한 책이어야 내놓고 파는 관행을 만들고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라인서점의 등장 후 과도한 할인경쟁이 벌어지면서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제 살 깎아 먹는 할인경쟁이 일반화하면서 서점들은 수익은 고사하고 살아남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생존이 불안한 건 대형 오프라인서점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자구책으로 서점의 판매대를 팔아먹기 시작했다. 매장 벽면에 광고를 하면 큰 판매대를 하나 주는 방식이다. 서울 강남에 있는 대형 서점의 알토란 같은 자리는 한 달에 수백만 원을 주어야 빌릴 수 있다. 그나마 대부분 입도선매되어 어쩌다 대형 신간을 펴낸 출판사는 그런 기회를 잡을 수도 없다.
인터넷 오픈마켓의 통 큰 할인공세에 시달리던 온라인서점들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이다. 그들은 출판사의 고혈을 빨아대기 시작했다. 광고비를 늘리기 위해 홈페이지 광고에 '주목 신간' '급상승 베스트' '리뷰 많은 책' '화제의 베스트 도서' 등의 문구까지 동원했다. 이런 기만적인 방법을 사용해 소비자를 유인했다는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제 버릇 남 주지 못하고 공정위 제재 이후에도 온라인서점들의 사실상의 사기ㆍ속임수는 여전하다.
온라인서점은 온갖 이벤트 비용을 출판사에 부담시키면서 책의 입고가격 인하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책이 거의 노출되지 않는다. 이런 요구를 거침없이 들어줄 수 있는 출판사는 어디일까. A 같은 출판사는 꿈도 꾸기 어렵다. B나 C같은 출판사는 애초 책을 만들 때 원가라고 든 것도 별로 없으니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A 같은 출판사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버티다 못한 A 같은 출판사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반값 할인에 나선다. 결국 독자들은 A, B, C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대형서점이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전락해간다는 느낌마저 든다.
출판계 종사자들은 이런 현실이 버겁기만 하다. 저자를 발굴하고, 좋은 번역가를 찾는 등 좋은 책을 만드는 원칙을 고수하면 할수록 더 힘이 든다. 이제는 광고나 홍보, 이벤트 등 그 어떤 프로모션도 할인마케팅의 위력을 뛰어 넘지 못하게 되었다. 할인만이 기승을 부리는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원칙 같은 건 잊어버리고 책값이 깎이더라도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 헐값에 책 만드는 것뿐이라고 한다면 누가 그를 나무랄 것인가.
출판인들이 유명무실해진 도서정가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출판사 밥그릇 챙기겠다는 게 아니다. 책값 할인 경쟁이 출판의 질과 다양성을 떨어뜨려 결국 독자에게 해악을 끼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9일 출판문화산업진흥법(출판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었다.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세 가지다. 최대 19%까지인 현 신간 도서 할인율 상한을 10%로 제한하고, 정가제 적용에 신ㆍ구간의 구분을 없애고, 실용서와 학습서 등 정가제 적용 대상에서 빠진 분야를 다시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 법안 발의가 알려지자 온라인서점 매출 4위 업체인 알라딘이 "판매가 통제로 출판시장을 보호하려는 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독자를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자의 손해는 물론이고 판매 권수 감소로 저자의 인세수입도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도한 할인경쟁의 최대 피해자는 창의성과 의외성이 넘치는 다양한 책에서 소외된 독자이다. 소수의 베스트셀러 저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저자(작가)는 책을 펴낼 기회조차 박탈당하기 때문에 감소할 인세수입조차 없다. 저질 번역이 판치는 바람에 번역가는 일을 얻기가 어렵다. 이런 현실을 조금이라도 고쳐가기 위해 이번 개정안은 통과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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