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ㆍ정조시대 탕평의 요체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이다. 오로지 재주만 보고 쓰겠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유재시용이라는 말이 51차례 나온다. 27대에 걸친 임금 가운데 영ㆍ정조 시기에 37번 거론된다. 70%가 넘는다. 알다시피 탕평은 임진왜란 이후 본격화한 당쟁의 폐단을 막기 위한 정책으로 당파 인사의 균형을 맞추는 데 그치지 않고 유재시용까지 나아갔다. 그럼에도 영ㆍ정조는 뿌리 깊은 인사 폐단을 실감했던 모양이다. 영조는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판서에 대해 사사로운 자가 아닌 것을 알고 있으나 당파의 습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또 암행어사를 지방에 보낼 때마다 현명한 이를 찾아 추천하라고 했으나, 돌아와서 천거하는 이가 없어 정조가 개탄하는 대목도 나온다.
24일 차기 총리 후보자로 김용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택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인사 원칙이 대탕평 인사이기에 과거를 되새겨봤다. 박 당선인은 지난해 12월 20일 당선 직후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에서 “모든 지역과 성별과 세대의 사람들을 골고루 등용하여 대한민국의 숨은 능력을 최대한 올려 100% 대한민국을 만드는 게 저의 소망”이라고 말했다. 유재시용의 뜻으로 본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당 태종은 ‘정치의 요체는 사람을 얻는 데 있고 재주가 되지 않는 자를 쓰면 반드시 다스림에 어려움이 따른다’면서 친소(親疏)를 불문하고, 귀천(貴賤)을 논하지 않고, 유재시용으로 관리를 선발하겠다고 했다. 더 거슬러, 위나라 조조는 유재시용을 위해 두 차례나 ‘현명한 사람을 구한다’는 포고령을 전국에 내렸다. 심지어 조조는 자신의 맏아들을 죽인 적장의 항복을 받은 뒤 제 사람으로 쓸 정도로 파격적인 인재 기용을 했다.
이렇게 본다면 박근혜 정부의 탕평은 대표적으로 지역 안배 수준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고, 이명박 노무현 김대중 정부의 인사까지 포괄적으로 눈여겨봐야 하지 않을까. 보수, 진보의 벽이 우리만큼이나 두터운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정권을 넘겨받은 1기 시절 조지 W 부시 대통령 때 기용된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을 유임시켰고, 정치적 라이벌인 힐러리 클린턴도 국무장관으로 안고 갔다. 보수, 진보 진영 내에서 사람이 넘쳐나지만 과거에도 이런 유연성과 포용력을 발휘한 예가 적지 않았다.
본격적인 인선을 앞둔 박근혜 정부의 탕평 의지가 여기까지 미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성향이 논란이 된 인수위원회 수석대변인이나 친정 식구들조차 고개를 흔든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문제로 이 정부 인사의 미래를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일 잘하는 사람을 뽑겠다는 실용 인사가 ‘고소영’ ‘강부자’인사로 비아냥을 듣고, ‘코드’니 ‘회전문’이니 하는 과거의 폐단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정권이 달라질 때마다 나아지는 게 있어야 할 터이니. 이런 면에서 인재를 두루 구한다면서 ‘밀봉인사’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영ㆍ정조가 유재시용을 여러 번 밝혔지만 제대로 성공했던 것도 아니고 미봉에 그쳤다는 평가도 있다. 그만큼 어렵다. 하지만 그나마 탕평인사라는 원칙이 있었기에 그 시기 조선 사회가 양란을 극복하고 전성기를 누렸던 게 아닌가 싶다. 정조의 대를 이은 순조 때까지 잠시 거론된 유재시용은 이후 외척의 세도정치 시기에 뚝 끊겼다가 고종 때 다시 언급되지만 명줄이 풍전등화와 같던 조선의 운명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박근혜 정부의 인사정책이 말뿐인 탕평이 아니라 실제가 돼 다음 정부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원칙으로 서기를 바란다. 주변국과 비교하자면 군자든, 소인이든, 인재든, 사람이 한참 부족한 이 나라를 위해서 좋은 일이고, 무엇보다 국민은 소모적인 인사 난맥상에 지쳐 있다.
정진황 사회부 차장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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