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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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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얼굴

입력
2013.01.2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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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뀐 지도 벌써 20여 일 지났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꽁꽁 얼어붙었지만, 이 꿈쩍도 안할 듯한 동장군도 때가 되면 물러가겠지요. 그러면 봄처녀가 찾아와 화사한 자태를 뽐낼 것이고, 염천왕이 다시 찾아왔다 떠날 것이고, 그러고 나면 가을의 산하가 다가와, 그 뒤에 찾아올 손님을 위해 한껏 치장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시간의 흐름처럼 고마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은 언제나 한없이, 끊임없이 흐릅니다. 하지만 처음도 끝도 없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공기처럼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무심코 보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면 우리의 삶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시간이 있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또 변합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 것 모두가 그 변화의 과정이고 결과인 것이지요. 이런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테니,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발견한 것이야말로 인류의 최대 업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간을 발견했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생겨났고 문학이 생겨났고 철학이 생겨났습니다.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된 것도 다 역사와 문학과 철학을 통해 문명을 이룩했기 때문이지요.

지난 세밑에 전철을 타고 가다가 씁쓸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맞은편 자리에 젊은 엄마와 어린 딸애가 앉아 있었는데,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나 엄마가 아이를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짐작컨대 아이는 뭔가를 조르며 칭얼댔을 것이고, 그런 아이를 엄마는 이리저리 달래다가 끝내는 화가 났겠지요. 전철만이 아니라 일상의 도처에서 흔히 만나는 광경입니다.

그런데 그날 내 눈에 붙잡힌 것은 엄마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었습니다. 전철 안이라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고, 그래서 표정만으로 아이를 야단치려다 보니 얼굴이 과장되게 일그러졌을 텐데, 그 표정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엄마의 저 표정이 아이의 기억 속에 새겨진다면 어떻게 될까. 엄마가 자신의 표정을 보았다면 과연 그런 표정을 아이한테 지어 보였을까.

집에 돌아온 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희로애락의 갖가지 표정을 지어보았습니다. 배우라도 된 것처럼 감정까지 잡으며 거울 속의 나를 향해 미소를 짓기도 하고 삿대질도 하면서 이런저런 표정을 얼굴에 떠올렸습니다. 즐거워 웃을 때는 저런 표정이 되는구나.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를 때는 저런 표정이 되는구나.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면 저런 표정이 되는구나. 내 얼굴이 빚어내는 표정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면서 나는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다중인격 속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짓고 스스로 섬뜩해서 놀랐던 표정 하나를 재연해 보이면서 아내한테 물었습니다.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있느냐고. 아내는 그렇다고 하더군요. 만정이 다 떨어지더랍니다. 거울을 보면서 억지로 쥐어짜낸 가상의 표정인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실제로 내 얼굴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사실 자신의 표정을 잘 모른 채 지냅니다. 기껏 알고 있는 표정이란 게 아침마다 거울에서 보는 비누칠한 얼굴이거나 카메라에 찍힌 몇 가지 평범한 얼굴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가시광선에 잡힌 표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색은 가시광선의 범위를 벗어난 곳, 적외선이나 자외선이 아니면 포착할 수 없는 곳에 따로 있지 않을까요. 전철에서 아이를 야단치던 엄마의 얼굴처럼. 평소에는 일상의 표정 속에 숨어 있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은 고야(스페인 화가)가 말한 '이성이 잠들면 깨어나는 괴물' 같습니다.

새해에는 누구나 괴물이 깨어나지 않도록 표정을 잘 다스려, 우리 모두의 얼굴이 좀더 밝고 편안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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