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긴 소설인 줄 몰랐다. 뮤지컬 영화 의 흥행 돌풍 소식에 원작이 궁금해서 완역본을 찾아 봤다. 장장 2,500쪽에 이르는 다섯 권짜리 소설을 읽는 데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했다. 줄거리에 빠져들어 한참 읽다가도 줄기차게 튀어나오는 빅토르 위고의 장광설에는 두 손 다 들었다. 이를테면 나폴레옹을 무너뜨린 워털루 전투에 대한 묘사만 100쪽 가까이 이어지고, 장발장이 어린 코제트를 데리고 숨어드는 수녀원을 소개하기 위해 가톨릭교회의 수녀원 제도를 그보다 더 길게 상술한다. 한 문장의 마침표가 여러 페이지를 지나서야 나타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책이 15만부가 팔렸다니, 놀랍다.
어린 시절 읽은 소설 은 어린이용 축약판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담임 선생님이 내준 숙제였다. 반 아이들은 책을 읽고 와서 토론회를 했다. 빵 한 덩이 훔친 죄로 19년 형을 산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쟁점으로 찬반이 갈렸다. 너무 가혹하다는 의견과, 안 됐지만 법은 법이니 어쩔 수 없다는 의견이 맞붙었다. 나는 장발장이 불쌍했다. 굶어 죽어가는 어린 조카들을 살리려고 빵을 훔치고 탈옥을 시도한 그의 처지를 전혀 돌보지 않은 인정머리 없는 법에 분노를 느꼈다. 원작에서 위고는 말한다. "죄인이 나쁜 게 아니라 그를 그렇게 만든 어둠이 나쁜 것이다"라고. 그런 장발장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자베르가 미웠다.
자베르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뮤지컬을 통해서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냉혈한이라고만 여겼던 자베르가, 장발장 덕분에 목숨을 구한 뒤 번민 끝에 자살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건 일종의 순교다. 이 완고한 원칙주의자는 자신이 믿었던 세계와 신념에 금이 가자 스스로 센 강에 몸을 던진다. 그에 비해 일신의 영달을 위해 한 입으로 두 말 하고, 하루 아침에 입장을 바꾸는 변절을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라고 분칠하는 자들은 비루하고 교활하다.
불쌍한 장발장과 나쁜 놈 자베르의 이분법에 갇혀 보이지 않던 다른 인물들도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난 때문에 매춘굴로 떨어진 창녀들, 마리우스를 향한 가슴 아픈 짝사랑의 주인공 에포닌, 바리케이드에서 죽음을 맞는 부랑아 가브로슈 등이 도드라지며 다가왔다. 뼛속까지 비열하고 악랄한 테나르디에 부부조차 가련하게 느껴졌다. 이 부부의 사악함이 꼭 천성 때문만일까. 그것은 가난이 증오를 키워서 만들어낸 괴물이 아닐까.
영화에서 가장 애틋하게 다가온 인물은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판틴이었다. 가난에 치인 끝에 몸까지 파는 밑바닥으로 떨어진 판틴이 노래하는 를 들으면서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 판틴을 짓밟아 버린, '한밤중에 천둥소리를 내며 들이닥친 잔혹한 현실'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더 서러웠던 것 같다. 연민은 공감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상처와 좌절감을 어루만지는 '힐링 영화'라고 분석했다. 공감하는 지점은 저마다 다르다. 누구는 에포닌의 짝사랑에 동병상련을 느끼고, 누구는 장발장의 희생과 헌신에 감동하고, 또 누구는 어둡고 불안한 격동기에 피어나는 청춘의 사랑에서 희망을 본다. 지난 연말 대통령 선거가 야당의 패배로 끝난 뒤 멘붕에 빠졌던 이들은, 바리케이드의 합창 에 나오는 '새 날이 오리라'라는 가사에서 용기와 격려를 얻었다.
위로도 좋고 힐링도 좋다. 하지만 그걸로 만족하기에는 영화 바깥 현실의 '레미제라블', 곧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 넣는 불의나 억압에 눈을 감은 채 연민을 말하는 게 옳은 일일까. 참된 연민은 종종 정당한 분노에서 나온다. 그 다음에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각자 다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상처에 반창고 붙이듯 이 작품을 힐링용으로 소비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