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벽 에워싼 거울들 앞에서 시각과 촉각만으로 몸을 엿봐고통스러운 긴장과 이완의 반복 탄력감 찾아가는 몸매에 행복도가쁜 숨소리와 금속성 소음속 새해맞이 다짐들 들리는 듯
일생을 부려먹는 몸뚱어리지만, 우리가 자신의 몸을 온전히 살펴보는 경우는 드물다. 우선은 그 하드웨어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눈을 감고도 배꼽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고 발가락이 열 개라는 걸 매일 만져보거나 꼼지락거려 보지 않고도 안다. 익숙한 것들은 물론 편하지만, 한편으론 무료하고 따분하다. 경로를 다 파악해버린 전자오락의 어떤 스테이지처럼. 걷고 앉고 숨 쉬고 드러눕는 아주 복잡하고 정교한 몸의 메커니즘조차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단순 일상일 뿐이다. 예외적으로 고장이라도 나면, 아니 고장이 나더라도 우리는 해당 부위에 집중해서 그 외양이나 움직임의 이상여부를 살피지 유기적 전체로서의 몸을 살피지는 않는다.
몸을 뜯어보지 않는(어쩌면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다양한 맥락에서 그 연원을 따져볼 수 있겠지만, 몸을 살필 때 우리는, 그것이 제 자신의 몸이어도 왠지 금기를 범하는 듯 조심스러워진다. 어떤 특별하고 은밀한 의도가 없어도 야릇한 외설의 기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관념 속에 내장된, 육체라는 하드웨어 자체가 지닌 고유성, 요컨대 특별한 개별성을 훼손하는 듯한 느낌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바슐라르의 해석처럼 금기는 언제나 위반의 매혹과 동반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저마다의 본능적 나르시즘으로 제 몸을 탐하면서 또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공간의 책임도 있을 것이다. 옷이라는 껍데기를 걸치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가 몸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은 뜻밖에 드물어졌다. 거의 매일 발가벗는 샤워장이나 목욕탕 탈의실조차, 빈약한 거울 탓에 또 낯선 시선들 탓에, 몸을 살피기에 그리 편한 공간은 아니다.
하지만 저 모든 장애를 넘어 우리의 몸을 전면적으로, 노골적으로, 또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바라보게 되는 곳이 있다. 피트니스센터다.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든(body-building) 체형을 가꾸기 위해서든(body-shaping), 단순히 쇠약해져 가는 근력이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든 거기 머무는 동안 우리는 세월에 예민한 얼굴이나 손, 목의 살결이 아니라 몸의 윤곽과 후미진 굴곡들을 낯선 듯 살피게 된다. 사방 벽을 에워싼 거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대상화한다.
가쁜 숨소리들이 금속성 소음에 섞여 공간을 채운다. 가슴을 한껏 부풀린 채 벤치프레스 위에 드러누운 이, 엉거주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덤벨과 씨름하는 이, 바에 매달려 오만상 찡그려가며 용을 쓰는 이, 매트에 누워 사지가 찢어져라 제 근육을 늘여놓고 신음을 참는 이…. 성대를 울려 나오는, 숨소리 같고 신음 같고 탄식 같고 기합 같고 감탄사나 환성 같기도 한 그 소리들은 조금씩 거칠어지다가 한계에 다다를 즈음 일순 멎기도 하고, 한꺼번에 비명처럼 터져 찢기고 갈라지기도 한다. 어떤 메시지로도 구체화하지 않고 소통의 욕망으로 제 형상을 꾸미지 않는 그 소리들은 청각이 아니라 촉감으로 다가서는 자극이다. 그것은 귓전을 맴돌다 흩어지면서 혈관을 타고 울컥울컥 흐르는 피의 출렁임이나 수축하고 팽창하는 심줄들의 율동으로 형상화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감각되는 소리들의 결. 아무렇게나 뭉뚱그려 숨결이라고 할 때의 그 다채롭고 이질적인 결들은, 단어 자체의 뉘앙스처럼, 청각적이기보다 촉각적이다. 또 그 닿음의 감각을 보조하는 것도 청각적이기보다는 시각적이어서 밀고 당기고 들고 버티는 그 광경들은 체험과 추체험을 통해 숨결 배후의 피의 흐름을, 신축하는 근육의 통증을 엿보게 하다. 하루 중 가장 붐비는, 가장 소란스러운 피트니스센터에서도 소음이 거슬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도 그래서다. 거기서 우리는 소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시각과 촉각으로써만, 자신의 몸과 긴밀한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는 가장 근원적이고도 경건한 직시와 반성, 순수하고 고요한 육체와의 소통이다.
그 곳은 우리가 물질적 생물학적 (재)생산이나 잉여의 쾌락과 무관하게 오직 몸을 위해 몸을 쓰는 예외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목적이야 조금씩 다르겠지만, 거울 앞에서, 기구 앞에서 우리는 단순하고 맹목적인 존재가 된다. 보장도 기약도 없지만 몸이 지탱할 생명의 시간이 연장되려니 하는 막연한 기대, 시간의 질(質)이 지금보다 나아지거나 쇠퇴하더라도 더디게 쇠퇴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기대가 거기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몸은 우리가 내면화하고 있는 미학적 기능적 육체의 모범적 상(像)과의 수긍하기 힘든 괴리로 우리를 충동질한다. 삶처럼, 무지개의 환상을 좇는 맹목의 욕심은 그 막연한 기대를 참담하게 짓밟는 경우도 더러는 있다.
저마다의 기구는, 수동과 능동의 입장 차가 있을 뿐 형틀의 원리, 고문의 원리와 흡사하다. 예컨대 근육이 지탱할 수 있는 한계에 다가갈수록 레그 레이즈(leg-raiser)의 저항력은 주리를 트는 고통으로 허벅지를 죈다. 수평 바에 매달려 몸을 당겨 올리는 순간 이두박근과 광배근은 이완하려는 안간힘으로 터질 듯 부푼다. 그렇듯 피트니스클럽의 모든 기구들은 몸의 크고 작은 근육들을 혹사시키기 위해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고안된 장치들이지만, 우리는 정육점에서 원하는 부위의 고기를 고르듯 그날그날 목표로 삼은 근육 부위를 공략하기 위해 가장 알맞은 기구를 고른다. 시선의 방향, 고개나 상체의 각도에 따라 부하를 받는 근육의 위치는 미세하게 달라진다. 그렇게 때문에라도 우리는 수시로 거울을 통해 몸의 자세와 불끈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근육운동이든, 근육의 부피가 커지기 위해서는 근섬유가 지탱할 수 있는 한계 너머의 자극으로 상처가 나야 한다. 상처가 아물면서 더 크고 쫄깃한 근육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과정의 반복으로 턱걸이를 할 수 있는 횟수는 늘어나겠지만 몸이 곧장 멋지게 아름답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키운 근육들을 미끈하게 다듬는 과정, 곧 바디 세이핑은 낮은 강도의 끈기 있는 반복 운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에너지의 폭발적인 분출에 이은 정교한 조각 작업. 자세가 흐트러져 근육이 아닌 골격과 관절에 하중이 걸리는 바람에 의도한 운동 효과는커녕 심할 경우 돌이키기 힘든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제 몸의 굴곡을 구조적으로, 미세한 변화의 양상과 함께 살피게 된다. 한 세트의 운동, 하루의 운동을 끝낸 뒤면 우리의 손과 눈은 부위의 양감과 질감을 전체의 조화 안에서 반성적으로, 때로는 나르시스의 몽환적 시선으로 어루만지게도 되는 것이다. 그 분석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몸은 낱낱의 세부로 다시 한번 대상화한다.
그런 시각적 촉각적 어루만짐의 반복은 우리의 몸을 긍정하게 하고, 영혼의 이물질들을 정화하는 효과를 선사하기도 한다. 조금씩 단단하게 부푸는 가슴, 탄력을 되찾아가는 복부와 엉덩이는 묘한 자신감으로, 우리를 들뜨게 할지 모른다. 아름다움을 매개하는 것은 감각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자신의 것으로 붙들어 키우는 것은 상상력이다. 과장된 낙관의 상상력 속에서 우리는 미래의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가불해 쓰면서 혼자 우쭐우쭐 행복해질 때도 있다. 피트니스센터에서의 활동이 생산이나 쾌락과 무관한 맹목의 몸짓이라고 했지만, 그 때의 행복감을 쾌감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쾌감은 애무와 같은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쾌감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매개된, 이를테면 자위의 쾌감이다. 그것은 몸을 비추기 위한 모든 거울의 방들, 예컨대 발레리나나 댄서의 연습실이나 배우들의 분장실 같은 공간이 베푸는 마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새해 맞이의 습관적 다짐들 가운데 헬스장 등록도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인 까닭도, 운동이 지니는 표면적(심미적ㆍ기능적) 기대보다 더 심층적인 이유,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능에도 너끈히 맞설 만큼 검질긴 환상 본능, 혹은 재생과 부활의 원초적 충동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 때의 피트니스센터는 언제나 원하는 대답만을 준비하고 있는 왕비의 거울방이 된다.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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