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희망을 그 시대에 고유한 기억으로 품어낸다. 이를 테면 우리가 이룩한 풍요가 그렇게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지난 시절의 가난을 기억으로 불러낸다. 꽁 보리 밥이 건강식으로 유행할 때에도 그것은 빈곤극복의 자랑스러운 기념품으로 여겼지 가난을 상기시키지는 않았다. 새로운 빈곤이 풍요시대의 독버섯처럼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번지기 시작하면 비로소 우리의 기억은 과거로 향한다. 우리의 미래는 지나간 과거에 있다는 듯이 희망의 흔적을 찾아서.
풍요시대의 빈곤이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한 지금 이곳에서 가장 많이 호출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행복'이다. 꿈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야 할 청춘 세대는 꿈을 실현할 일자리가 없어 아파한다. 아픈 청춘이라고 말할 겨를도 없이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는 좀 여유를 가질 법 한 베이비 붐 세대도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모두 다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 시대에 '행복사회'를 국정 목표로 삼은 박근혜 정부는 정말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하니 어쩌면 행복헌장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학교 교실에서 외우던 시절이 생각난다. 국민이 행복하려면 경제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경제성장을 위해선 국민의 도덕적ㆍ정신적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국민이 행복하지 않은 경제성장은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이 만연하고 있다. 그 후 45년이 지난 지금 그 딸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을 책임지겠다고 한다. 아버지는 양적인 경제상장을 이루고 딸은 질적인 행복사회를 실현한다면 이처럼 멋지게 세대갈등을 갈무리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부탄처럼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을 국정운영철학으로 도입할지는 미지수이지만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 행복사회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행복사회를 국정지표로 설정하면 두 가지 난관에 봉착한다. 하나는 경제성장과 행복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이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 역설'(Easterlin's paradox)이 아무린 사실이라고 해도, 우리는 행복사회를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인지를 합의해야 한다. 모두가 영적인 행복을 위해서 부탄에서 살고 싶어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행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이에 대한 대답이 사람마다 제각각인 것처럼 행복사회에 대한 학자들의 처방도 다양하다. 부탄이 행복사회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심리적 복지, 여유시간, 공동체의 생동감, 문화, 건강, 교육, 생활수준, 생태환경, 통치형태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구체적 모습은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가 부탄의 '국민총행복'은 아니지 않은가.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제각각이라면 행복사회의 문제는 결국 서로 다른 행복관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이다. 사회가 양극화 되어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면, 개인별 맞춤 행복을 증진하는 것보다는 사회적 양극화의 해소가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다. 행복사회의 문제는 '행복'이 아니라 '사회'이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에 집중하고 합의를 이끌어낸다면 어느새 행복사회가 실현되지 않을까? 우리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조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행복은 어쩌면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미래의 희망인 것처럼 행복사회의 나팔 소리가 커질수록 소로의 시 구절이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행복이란 한 마리 나비와 같습니다. 나비는 쫓아다닐수록 더욱 더 당신을 피해 달아납니다. 그러나 당신이 다른 사물로 관심을 돌리면, 나비는 날아와 당신의 어깨 위에 살포시 앉을 것입니다."
이진우 포스텍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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