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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동안(童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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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동안(童顔)

입력
2013.01.1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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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 기준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남자 77.65세, 여자 84.45세로 십년 전과 비교할 때 각각 4.8년과 4.4년 증가했다. 불로장생약을 구하라고 소년소녀 3,000명을 신기루의 땅 봉래산에 보냈다는 중국 진시황을 꼽지 않더라도 영생(永生)은 인류의 근원적 꿈이다. 그러니 앞선 통계치는 좋은 뉴스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명의 증가분은 오래 산다는 뜻 너머 그만큼 노년의 삶이 연장되었다는 엄한 사실을 가리킨다. 그래서일까? 우리사회에서는 최근 몇 년 과하다 싶을 만큼 젊음을 추앙하며 길어진 인생의 시간을 건강, 생기발랄, 아름다움으로 채우려는 시도가 봇물을 이룬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동안'(童顔)에 열광한다. 동시에 나이 듦에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심리적 거부 반응을 보인다. 후자의 경우 늙음, 무능력, 추함, 고루함과 동의어처럼 여겨지고, 생물학적인 삶이 아니라 사회적 삶이 끝난다는 두려움이 어느새 우리 안에 내면화된 것이다.

문화예술계에서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해 지금은 지극히 당연해진 젊음 선호 현상 또한 이와 상관있다. 대중문화산업에서 아이돌 광풍, 문단에서 '젊은 문체', '발랄한 감수성', '낯선 젊음' 같은 수사의 범람, 미술계에서 '영 아티스트'가 모든 미술활동을 독점하는 이면에는 요컨대 늙음에 대한 집단 강박과 심리적 물리적 부정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돌발 뉴스, 실시간 검색 핫이슈, 급부상 스타, 대박 같은 표현의 남발은 그런 무의식의 표상이다. 그 와중에 고사 직전까지 내몰린 것은 성숙한 정신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적 이해타산 없이 기꺼이 존경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의 부재, 공동체 내에서 깊은 안목과 풍부한 경험과 대의에 기반을 둔 통찰력을 가진 어른의 멸종이다. 각종 건강관리 프로그램과 성형술 덕분에 빳빳하고 꼿꼿해진 얼굴을 가진 어른은 도처에 넘쳐나는데, 정작 외적으로 젊어진 그 어른들의 정신세계가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왜곡하고 젊은이들과 이전투구를 벌이며 쪼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최근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정경유착의 폐해를 풍자한 시를 써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된 적이 있는 인물이 사회에 건강하지 않은 분란을 일으키는 상황을 마주했다. 당시 국민들의 비판적 판단력을 일깨웠던 인물, 이후로도 어느 때까지는 체제의 은밀한 억압을 까발리고 기득권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 많은 이가 진정어린 존경을 보냈던 그 인물 말이다. 여기서 굳이 이름 석 자를 거명하지 않아도 누군지 금세 알아챌 만큼 그 인물은 특히 근래 몇 달간 부단히 특정 정파와 특정 기득권 집단이 좋아할만한 핫이슈를 생산하고 있다. 그가 대통령당선인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왜냐면 그 점은 진정성이 있든 없든 과거 자신이 저항했고 자신을 핍박했던 측을 사적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돕는 면모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그 인물이 얼핏 들어도 비논리적인 말, 비단 누구 혹은 어느 편이 아니더라도 들으면 폭력이 느껴지는 언사를 특유한 권리인 양 해 젖히는 데 있다. 그 권리는 과거에 그가 우리사회 대의를 위해 독재체제에 저항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여해줬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그는 마치 그 권리가 자신이 우리사회를 향해 어떤 말을 해도 되는 권력, 그 말이 궤변인지 언어폭력인지 스스로 거르지 않고 쏟아내도 좋은 특권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실상 그의 말들은 대부분 '나는 욕쟁이'라는 자기면책내지는 유아적 무책임으로부터 발화돼 듣는 이들을 괴롭힌다.

외모만이 아니라 정신이 어려지고 있는 이 시대, 정말 두려운 일은 공론장에서 궤변, 언어폭력, 몰상식이 넘쳐나는데 그걸 바로잡고 더 나은 길로 이끌 진짜 어른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의 의식 무의식이 성숙한 경험과 새로운 현상의 교직으로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형외과 박피시술처럼 박리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강수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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