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사 중에는 의약품을 소재로 한 것들도 있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12ㆍ19 대선이 끝난 후에 이런 건배사가 갑자기 번진 게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소화제’, “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라는 건배사는 이긴 쪽에서 쓰는 것 같고 (아니, 쓰면 맞을 것 같고), ‘마취제’, “마시고 취하는 게 제일이다!”는 패배한 쪽에서 할 말처럼 보인다.
작년 말에 누가 이 두 가지를 송년모임에서 소개하기에 내가 즉각 한 가지를 더 만들었다. ‘주사제’다. “주님을 사랑하는 게 제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님은 물론 하나님이 아니라 ‘酒님’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자 풀이까지 해서 설명을 해야만 알아듣는 건배사는 썩 좋은 게 아니다.
“주정하지 말고 사라지는 게 제일이다!” 이러면 술자리에서 상습적으로 중간에 새는 사람들의 건배사로 제격일 것 같다. 말썽꾼 아들녀석에게는 “주정하지 말고 사고 치지 말고 제때 들어와!”이러면 되지.
의약품의 종류는 많다. 하나하나 다 건배사로 만들어 써먹을 만하다.
용해제(溶解劑)는? “용감하게 해내는 게(해보는 게) 제일이다!”라고 할 수 있겠지. “용기 있게 해결하는 게 제일이다!”도 그럴 듯하다. 건배사가 아니라 3행시 같긴 하지만 “용서 없이 해고하면 제일이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겠다.
설사를 멈추게 하는 지사제는? “지금처럼(지금부터) 사랑하는(사귀는) 게 제일이다!”, “지켜주고 사랑해주는 게 제일이다!” 아무렴, 사랑을 하는데 푸다다다다 설사를 해서야 되나?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지구를 사랑하는 게 제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완하제(緩下劑)는 설사와 반대로 변비를 해소하는 약인데, 이걸로 무슨 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완전하게 하는 게 제일이다!” 뭘 완전하게 해? 배설을 완전하게 한다는 말인가? 말을 바꿔 “완벽하게 하는 게 제일이다!”라고 하면 건설공사 현장에서 쓰는 건배사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완하제는 일반인들에게 좀 생소해서 이 말이 건배사로 쓰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해열제는 어떻게 할까? 생명보험 업계를 비롯한 영업사원들은 실적 올리기를 강조하면서 “해결자세 열혈정신 제일주의”라는 구호로 만들어 쓸 수 있겠지. 불가에서는 “해탈 열반 제대로!”라고 외친다고 하면 너무 말장난이 심할까? 스님들이 일제히 주먹 쥔 팔을 쳐들고 “해열제!”하고 외친다고라고라?
다음은 강장제. 강장제를 먹는 건 건강하게 장수하고 싶어서일 테니 일단 “강건하게 장수하는 게 제일이다!”라고 해볼까? ‘강건하게’가 약간 어색한데 ‘강렬하게’로 바꿔 쓰면 좀 나으려나? ‘강인하게’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지만 이것도 좀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정력제는 “정신일도(精神一到), 역량 강화, 제일주의”라는 식으로 실적을 독려하는, 약간 노티 나는 말이 일단 생각난다. “정열적으로, 역동적으로, 제일 먼저!”라는 말도 만들 수 있겠다.
회복제라는 것도 있던데? 그런데 여기에서 한 말씀. 피로회복제는 말이 안 된다. 피로를 회복하면 어찌 되겠노? 피로를 해소해야지 회복하면 되겠나? 그러니까 회복제는 집어치우고 해소제라는 말을 하나 만들어야 한다.“해결하고 소통하는 게 제일이다!” 이러면 점잖은 거고, 술꾼들에게는 “해장 술로는 소주가 제일이다!”가 어울리겠다.
해독제는 “해가 지면 독한 술이 제일이다!” 이 말은 ‘주경야독’과 비슷하다. 주경야독? 낮에는 가벼운 술, 밤에는 독한 술! 그러니까 晝輕夜毒을 말하는 거지. 인간의 탈을 썼다 하면 누구든지 낮이고 밤이고 열심히 술을 마셔야 한다.
다시 맨 앞에 소개한 ‘소화제’로 돌아가 볼까. 걸핏하면 버럭버럭 소리지르며 화내기 일쑤인 아내에게 “소화제, 소리 지르고 화내는 거 제일 싫어!”라고 하며 애교를 떨면 부부생활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이번엔 아내가 술꾼 남편에게 한마디 할 차례. “소화제, 소주 마시고 화풀이하면(화만 내면) 제일이냐?”, “마취제, 마셨다 하면 취하는 거 제일 싫어(지겨워)!”
그런데 의약품 건배사의 마지막 글자 ‘제’는 제일이라는 말 외에 다른 게 없을까? 왜 없어? 제기랄, 제까짓 게, 제꺽, 제대로, 제로, 제멋대로, 제발, 제법 이런 말을 넣으면 되지.
소화제는 “소리 지르고 화내는 거 제로!”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해열제는 “해보자, 열심히, 제대로!”, “해피하게, 열심히 살자, 제발!”이라고 하면 그런대로 이야기가 된다. 그 해열제를 “해고 무효, 열 받는다, 제자리로!”라고 만들면 해고된 근로자들이 농성장에서 외칠 법한 말이 되겠다. 사용주는 해열은커녕 열이 더 오르겠지만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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