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려고 했는데, 뛰어가야 할 것 같다"
국내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 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3'의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일본의 소니와 파나소닉이 CES에서 '깜짝'공개한 56인치 4K(UHD) OLED TV를 염두에 둔 얘기였다. 이 제품은 풀HD 화면보다 화질이 4배가 높은 UHD에, 차세대 기술로 주목 받는 OLED를 결합한 세계 최초 TV. 차세대 TV 시장을 선도해 온 국내 업체들의 허를 찌른 제품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일본 업체가 아니었다. 두 제품은 모두 대만의 AUO와 공동으로 개발한 OLED TV 패널을 사용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기미가 보였던 중국과 일본 업체들의 공조분위기가 대만 등을 포함해 범중화권과 일본의 동맹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결국 목표는 한국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글로벌 TV 시장에 '일본-중화 동맹'이 가시화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은 한국과 함께 세계 TV시장을 삼등분하고 있는 경쟁국이지만, 최근 들어 손을 잡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는 상황. 이는 일본과 한국이 주도해 온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한때 전자왕국으로 불리던 일본업체들이 손을 내밀만큼 중국의 성장세가 무섭다는 얘기다.
지난해 샤프와 중국 폭스콘이 손을 잡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샤프는 주력 LCD 생산 거점인 사카이 공장을 중국 폭스콘의 모회사인 혼하이정밀과 공동출자 체제로 전환했다. 샤프는 실적 악화에 따른 재정 부담을 줄이고, 혼하이는 스마트 기기 패널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니와 파나소닉 역시 국내 업체에 뒤진 OLED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지난해 대만의 AUO와 손을 잡았다. AUO는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에 이어 세계 3위 LCD패널 제조업체로 꼽힌다. 하지만 OLED 시장에선 아직 존재감이 미미해 결국 일본업체들과 손을 잡았다는 해석이다.
LCD의 경우 한국과 중국의 기술력 차이가 거의 사라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이번 CES에서 중국 TV업체 하이센스와 TCL은 세계 최대 크기인 110인치 UHD TV를 선보였다. 심지어 삼성전자가 내놓은 110인치 UHD TV조차 중국 BOE의 패널을 사용했다. BOE는 세계 5위권 LCD 업체이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반도체를 제외한 디스플레이와 스마트폰 산업의 경우 중국 기업들이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공격적인 시장확대를 추진하며 국내업체와 격차를 크게 줄였다"며 "특히 완제품만이 아닌 부품 기술력의 발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LCD 부문에서 일본-중화의 협공이 본격화되면 국내 업체들은 결국 차세대 기술인 OLED에 사활을 걸 수 밖에 없다. OLED의 경우 반도체와 유기화학 기술의 결합이기 때문에 반도체부터 유기화학 산업까지 수직계열화가 된 한국 디스플레이 기업들이 중국업체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이라는 평가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소니가 이번에 선보인 4K OLED TV가 제품이 정식 출시되려면 2년 정도는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이 때쯤 되면 중국 제품들도 상용화에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업체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얘기다. 소 연구원은 "국내사들이 생존 차원에서라도 선제적인 OLED 투자를 통해 경쟁 우위를 지속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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