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있었던 방송토론의 한 장면. 네 명의 정치평론가가 정치현안을 토론하고 있었다. 총리인선 문제가 떠오르자 사회자가 물었다. "이명박정부 초대 총리가 누구였죠? 기억이 잘 안 나네." 참석자 네 명이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결국 사회자가 스탭들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회자가 말했다. "아! 한승수총리라 하네요."
정치평론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 이것이 이 나라의 총리다. 때론 청와대 참모나 장관들까지 총리를 잊어버린다. 이름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내각 인사를 하거나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도 총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발표직전 "아! 총리… 총리께 보고 드렸나?" 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래서 되겠는가? 변화가 심한 세상이다. 대통령이 아니면 챙겨가기 어려운 근본적 과제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러나 총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이러한 일을 할 수가 없다. 일상적 국정운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역할강화가 쉬운 일은 아니다. 참여정부 초기의 일이다. '책임총리'를 구현한다는 취지 아래 청와대 정책실 규모를 최소화 한 적이 있다. 규모가 크면 내각이 하는 일에 간섭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이 구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각 부처에서 들어오는 보고 때문이었다. 내각 차원에서 알아서 하라는 지시를 수없이 해도 보고는 쏟아져 들어왔다.
더 곤란한 일은 내각에서 일어났다. 청와대의 관여가 줄어든 만큼 자율적으로 움직여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곧 혼란이 일어났다. 2003년의 물류대란은 그 좋은 예였다. 여러 부처가 관련된 문제였는데 어느 부처도 문제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포항이 마비되다시피 한 뒤 참다 못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주무부처가 어딘지를 물었다. 장관들은 대통령의 질문에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이후 정책실은 현안과 대통령과제를 함께 챙기는 기구로 다시 돌아갔다. 그 규모도 몇 배로 커졌다. 청와대 중심의 오랜 관행과 문화를 깨지 못했던 것이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회나 여당이 총리를 선출하게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총리의 임기를 보장하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 검토할 방안이지 지금 당장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제한된 효과나마 거둘 수 있는 것은 대통령과 총리의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있어 총리의 힘은 총리가 대통령의 정책적 의지와 방향을 얼마나 잘 읽을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제 아무리 '실세총리' 소리를 들어도 총리가 한 말을 청와대가 한두 번만 뒤집어도 그 총리는 바로 '허세'가 된다.
흔히 말하듯 이해찬 전총리가 비교적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통령을 의중을 잘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오랜 관계나 행정능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정책적 의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과의 주례회동 등 통상적으로 운영되는 채널 이외에 청와대 참모들과 당 3역, 주요 장관들이 참여하는 총리공관 '8인 회의' 등 다양한 채널이 있었다. 청와대 정책실장이 총리가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는가 하면, 청와대 정책실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총리실 간부가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채널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정책적 구상이나 고민을 총리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는 대통령의 자세다. 제 아무리 좋은 채널이 만들어져도 전달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전달될 수가 없다. 총리는 그만큼 '허세'가 된다.
새 정부에서 '책임총리'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첫 총리는 지금 우리가 관심을 쏟는 만큼의 역할을 하게 될까? 글쎄? 지나치게 절제된 당선인의 표현과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인수위로 보아 크게 기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혼자만의 생각인가?
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