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귀에 박힌 동요 가 요즘 아이들 감각에는 생소할 듯하다. '댓돌 위에 신발들'이나 '짐수레의 바퀴들'을 자주 접할 수 없기도 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가장 먼저 배웠던 '앞으로 나란히'도 교육현장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더러 학교를 지나가다 보면 조회시간에도 아이들이 좌우로 줄을 맞춰 선 대신 그저 소속 학급이 구분될 정도로 대강 서 있다. '앞으로 나란히'가 민주교육이 지워야 할 군대문화의 유습으로 여겨진 결과다.
■ 아이들의 스트레스를 늘리고 창의력을 줄인다는 이유로 초보적 질서 교육조차 늦추어 아이들이 행복해졌다면 다행이겠지만 분명한 효과는 확인하기 어렵다. 오히려 머리가 굵은 뒤에 흐트러진 몸가짐을 지적 받을 때의 스트레스만 더울 커진 듯하다. 질서나 남에 대한 작은 배려가 몸에 익으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만, 억지로 그런 요구에 따르려면 힘들다. 훈련되지 않은 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예방주사를 걸러 겪게 되는 전염병처럼 저항력 없이 노출된 스트레스이기 쉽다.
■ 한국사회의 스트레스는 세계 최고의 자살률만으로도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고속성장에 따른 급격한 농촌공동체와 가족 해체, 입시ㆍ취업 전쟁과 사회 양극화가 또래 집단의 정서적 유대까지 흔들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장의 노동시간이나 최고 수준의 비정규직 비율 등도 지적된다. 하나같이 스트레스의 요인(Stressor)에 대한 지적일 뿐이다. 스트레스가 그 요인과 함께 수용 주체(Stressee)의 '소화력'에 따라 크게 다른데도.
■ 지적된 요인을 해소하려는 노력과 함께 주체의 소화능력을 끌어올리는 반복훈련 없이 한국사회를 짓누른 스트레스는 풀어헤치기 어렵다. 그 훈련은 사회화 첫 단계인 보육원이나 놀이방에서 시작돼야 한다. 특히 본능적으로 일탈에 익숙한 사내 아이들은 기초적 정리정돈과 예절, 규율, 이타적 행동 훈련을 거쳐야 편안히 '쩍벌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정과 학교에서의 꾸준한 '나란히 나란히' 교육은 미래의 스트레스를 덜어줄 작고도 효과적인 투자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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