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대표 선수로 출마해 라이벌 후보를 17% 포인트 차이로 너끈히 이긴 문용린 서울시교육감은 그야말로 행운의 사나이다. 상대 진영의 잘못된 후보 낙점이 그에게 손쉬운 승리를 안겼다. 승인(勝因)을 놓고 문 교육감 쪽에선 아전인수 식의 여러 분석이 분분한 모양이지만, 다 부질 없다. 유권자 마음을 파고 드는 '착한 공약' 운운했지만 이것도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보기엔 단 한가지 이유밖에 없다. 진보 진영이 귀를 닫고'뼛속까지 전교조 후보'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문 교육감의 집요한 전교조 공격은 그래서 쉽게 먹혔다. 결과론적이긴 하나, 진보 쪽에서 탈 전교조 후보를 내세웠다면 선거 결과는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깊게 파고들 것도 없다. 야권 성향이 강한 20대 유권자들은 진보 진영 단일 후보로 나온 이수호씨보다 문 교육감에 오히려 6%포인트 이상 표를 더 줬다. 20대의 대선 투표와는 사뭇 다른 결과다. 표밭으로 여겼던 20대가 외면했다는 건 전교조로선 치욕이다. 문 교육감은 이런 진보 진영의 약점을 꿰뚫고 있었던 거다. 서울시교육감 재선거를 하게 만든 곽노현 전 교육감은 전교조가 밀었을 뿐 태생이 전교조는 아니었다. 전교조 낙인이 찍혔다면 2010년 지방선거 때도 보수 후보가 이겼을 것이다. 보수의 난립 따위는 하찮은 일이었을 게다.
서론이 길어진 것 같다. 불안했던 승부를 쉽게 돌려놓으면서 수도 서울 교육의 수장을 거머쥐긴 했으나, 이건 서막일 따름이다. 문 교육감은 지금 시험대에 서 있다. 보궐선거인 까닭에 고작 1년6개월짜리 임기지만, 그에겐 4년 이상의 의미가 부여돼 있다고 본다. '교육 장관보다도 힘든 서울시교육감'을 인지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산적한 서울 교육의 현안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그는 2000년 김대중 정부때 짧긴 해도 7개월여의 교육 장관을 했다. 교육학자로서 탄탄한 이론에 특유의 기발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내 교육 관료들의 혼을 빼놓기도 했다. 추진력과 창의성은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런데, 13년 만에 '작은 교육부'를 이끌게 된 그의 행보는 실망스럽다. 일의 우선 순위를 잘못 정해놓고 가는 것 같다. 선거 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외쳤던 '교육의 이념 탈피'는 새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곽노현 색깔을 빼는 게 그렇게 급한가. 학생인권조례 폐지나 수정이 최우선 순위여야 하나. 혁신학교 추가 지정 문제는 학부모 의견을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여 순리대로 풀면 될 일이다. 이념의 칼춤에 빠져드는 순간부터 교육은 망가진다.
기실 학부모나 학생, 교사들이 원하는 건 따로 있다. 중1시험을 폐지하면 갓 초등학교 졸업한 학생들이 미리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공약도 순진하기 짝이 없다. 이러니 취임하자마자 말을 바꿀 수 밖에 없었고, 신뢰 저하로 이어지는 것 아닌가.
문용린은 교육감을 뛰어넘어야 한다. 교육 장관의 자세로 일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정책의 큰 그림을 머릿속에 넣어두되, 학교 현장이 요구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좇아야 한다. 지지해준 보수단체의 논리에 함몰돼선 안 되고, 진보 쪽의 치우친 주장 역시 경계해야 한다. 오직 학교 현장에 모든 생각과 행동이 맞춰져 있어야 만신창이가 된 서울 교육이 살아난다.
공교육 붕괴는 선을 넘어섰다. 그가 장관을 할 때 이미 조짐이 나타났을 거다. 교육 장관 출신의 첫 교육감은 그래서 '새로운 기록'을 세울 절호의 기회다. 한 나라 교육의 최종 결정권자로서의 숱한 경험을 우리나라 전체 교육의 바로미터가 될 서울 교육에 녹아내면 된다.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됐잖느냐, 조금 지켜봐 달라고 읍소할 수 있겠지만, '교육의 프로'에겐 왠지 어색하다.
그의 성공 여부는 몇 개월만 지나면 판가름 날 것이다. 교육 현장의 냉엄한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처럼 한가한 행보를 보이거나, 특정 진영을 의식한 발걸음으로는 후한 점수를 받긴 어렵다. 선택은 문 교육감 몫이다.
김진각 여론독자부장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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