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수다가 어느 순간 적막한 슬픔으로 바뀌며 관객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 게 뭔가.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마저 흩어지면 그 너머엔 뭐가 있을까.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 중인 극작가 겸 연출가 이해성(44ㆍ극단 고래 대표)의 신작 '사라지다'는 사색적인 연극이다. 잔잔하게 흐르다가 깔깔 웃다가 가슴 한 켠에 시큰하고 조용하게 고이는 슬픔을 만난다. 진지하되 무겁지 않고, 쓸쓸하지만 따뜻하고 재미있다. 2010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신생 극단 고래와 남산예술센터가 공동 제작했다.
무대는 어느 해 연말, 한 아파트 거실이다. 삼십대 중반의 여자 친구 넷이 모여 수다를 떤다. 그들이 '이모'라고 부르는 집 주인은 트랜스젠더다. 대화는 솔직하고 구체적이다. 사랑, 행복, 욕망, 섹스, 행복, 일 등에 관해 거침 없이 쏟아지는 즐거운 수다는 중간 중간 목소리만 들리는 한 여자의 독백이 끼어들면서 차분해진다. 그가 누구인지는 나중에 밝혀진다. 저마다 간직한 상처와 비밀도 하나씩 드러난다. 네 친구는 각각 금지된 사랑, 원치 않은 임신, 동성애, 우울증을 고민하고, 이모는 이모대로 성전환자로서 남 모를 아픔을 견디고 있다.
이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사람, 독백의 주인공은 세상을 떠난 친구다. 산 자들의 이야기와 죽은 자의 독백을 따라가는 동안 삶과 죽음은 경계를 지우고 하나로 녹아든다.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는 연민이 파고들면서 남자와 여자, 몸과 마음, 사랑과 욕망,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선 또한 흐려져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만 남는다. 죽은 여자와 그가 사랑한 남자가 등장해 산 자들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의 침묵은 긴 여운을 던진다.
이 연극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다양한 경계를 넘나든다. 극히 일상적인 언어와 문학적 표현을 오가고, 수다와 사유를 번갈아 배치하며, 빛과 어둠을 강하게 대비하는 조명으로 극의 밀도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배우들은 좋은 앙상블을 보여주고 있다. 연기 인생 35년 만에 처음으로 트랜스젠더 역을 맡아 여장하고 나오는 남자 배우 박용수의 변신도 화제다. 중후한 이미지로 알려진 그가, 전혀 여성스럽지 않은 외모로 자연스럽게 배역을 소화하는 관록을 확인할 수 있다. 공연은 남산예술센터에서 20일까지 한다.
오미환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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