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는 건배사 수요가 높은 시기이다. “~을(를) 위하여~!”라고만 외치면 싱겁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임에서 외칠 만한 기발하고 재미있는 건배사가 없을까 늘 고심한다.
글을 쓰면서 ‘건배사’라는 제목만 붙이면 독자가 부쩍 늘어난다. 누가 ‘신상’을 소개하거나 만들어 내면 그걸 잊지 않고 써먹기 위해 ‘적자 생존’의 자세로 수첩이든 스마트폰이든 열심히 적어두는 사람들이 많다.
미처 적지를 못한 채 1시간도 안 돼 잊어버리고 “아까 그 말이 뭐였지?”하고 전화를 걸어 묻는 사람도 보았다.
최근 갑자기 유행하는 것은 “너나잘해”다. “너와 나의 잘 나가는 새해를 위하여”라나 뭐라나. 사람들은 이 말이 재미있다고 마구 써먹고 있다. “이런 말 아세요?”라면서 “너나잘해”를 선창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절로 하품이 나온다.
그런데 이건 사실 말이 안 된다. 말의 앞 글자만 따서 만드는 게 건배사인데, 그런 점에서 따져보면 “너나잘해”가 아니라 “너나잘새”가 돼야 맞다. “너나잘새”는 무슨 뜻? 너나 밤을 잘 새우라고? 시험공부 많이 하라는 뜻? 아니면 밤새워 잘 놀라는 뜻? #$%&*^~! 그야말로 ??이다. 나는 그래서 이런 건배사를 쓰지 않는다.
또 하나 요즘 유행하는 것은 “남행열차!”. “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기 정부에 줄 잘 서자!”라는 뜻이다. “남은 기간 행동 조심하고 열심히 눈치보다 차기 정권까지 살아남자!”라는 풀이도 있다. 말이 길다.
어쨌든 둘 다 별로 좋은 뜻은 아니지만 정권교체기에 잘 적응하고 줄 잘 서서 좋은 자리 얻거나 승진하고 싶은 마음을 비꼬는 건배사라고 보면 된다. 거부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지금은 정권 교체기이기도 하지만, 각 단체의 회장이 막 바뀐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남행열차’를 “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기 회장 도와주자!(차기 회장에 줄 잘 서자!)”라고 바꾸면 얼마나 이뻐?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가 기분 좋을 것이다.
원래 말을 쉽게 바꿀 수 있게 열려 있는 건배사가 좋은 법이다. 또 “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세대 리더가 되자!”라고 하면 청장년세대에 좋다. 자동차 판매대리점 직원들이라면 “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를 많이 팔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자동차 수리업체라면 “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를 잘 고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남행열차”라도 다른 뜻의 건배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남다른 행동’을 ‘남 몰래 행동해’라고 말을 바꾸면 어떤 건배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남들처럼’으로 시작하면? 연애가 잘 안 되는 남자들 같으면 “남자답게 행동하고 열정적으로 차근대자!”라고 할 수 있다. 차근대는 게 뭐냐고? ‘몹시 싫어하도록 은근히 자꾸 귀찮게 군다’는 뜻인 치근대다와 비슷한 말이다. 치근대다보다는 조금 약하고 귀여운 말이라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자꾸 놀아달라고 아빠를 귀찮게 하는 게 차근대는 것이다.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자답게 행동하고 열나게 차버리자!”라고 할 수 있겠지. 물론 이렇게 이상한 행동구호 같은 건배사를 쓸 일은 거의 없겠지만. 만약 도둑님들이라면? “남 몰래 행동하고 열나게 차지하자!” 이럴 수 있을라나? ㅋㅋㅋ.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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