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의 잘못, 이제 말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들에 대항했던 시절 가졌던 사명감을 바탕으로 다시 공부해 공익적 법률활동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법시험 3차 면접자들을 불합격시킨 이른바 '사시 면접 탈락 사건'의 피해자 정진섭(61) 전 한나라당 의원이 3월 사법연수원에 44기로 입소한다. 그가 입소하면 최고령 사법연수원생으로 기록되게 된다.
1972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한 정 전 의원은 3학년이던 1975년 유신정권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체포된 뒤 퇴학당했다. 그는 "당시의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사회에 반대하고 조금 더 크게 목소리를 냈을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우여곡절 끝에 1980년 3월 복학한 그는 공부에 매진해 이듬해 제23회 사시 1, 2차에 합격했다. 그러나 유신 반대 시위 경력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사시 3차 면접시험에서 시국 관련 시위 전력을 가진 응시자들 '국가관과 사명감 등 정신자세에 흠결이 있다'고 간주, 일괄적으로 불합격시켰다. 그는 1년 후 재차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또 다시 탈락이었다.
당시 정 전 의원과 같은 이유로 면접에서 탈락한 사람은 총 10명. 이들 중 진봉헌(57)씨 등 4명은 1984, 1986년 다시 시험을 봐서 합격해 변호사가 됐다. 다른 6명에게도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 건 무려 26년 후인 2007년이었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이들 6명에게 사법연수원 입소 기회를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한 것이다.
법무부는 2008년 정 전 의원을 비롯해 한인섭(54) 서울대 법대 교수, 신상한(57) 전 산업은행 감사실장, 조일래(59) 전 한국은행 법규실장, 박연재(61) 전 체신부 장관, 황인구(54) 전 SK가스 석유개발팀장에게 뒤늦은 합격증을 배부했다. 신 전 실장, 조 전 실장, 박 전 장관은 이후 사법연수원을 수료해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 교수는 정년이 남아 연수원 등록을 하지 않았으며, 황 전 팀장도 현재로선 연수원 등록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의원은 그때 합격증을 받고도 5년이 더 지난 지난해 12월 미뤄왔던 사법연수원 입소 등록을 마쳤다. 그는 "사법시험 제도가 2017년 완전히 폐지될 예정이라 한 해라도 젊을 때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뒤늦게 입소를 결심한 이유를 말했다. 사법연수원의 젊은 동기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법률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바뀐 법률이 너무 많다. 중요한 약속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은 공부하는 데 투자하고 있다."
그는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이 판ㆍ검사가 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며 "나이가 있어 그들처럼 살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믿던 민주화의 가치와 사명감만 잃지 않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변호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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