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의 유학 시절, 토론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했다. 처음에는 독일어를 익히기에 좋다고들 해서 무슨 말들이 오가는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그 프로그램을 억지로 보게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사회를 맡은 여성 방송인의 이름을 딴 프로그램이었는데, 우리나라의 백분토론 혹은 심야토론과 비슷한 정치 토론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정치인이나 교수 혹은 기업인이 등장하여 사회적 현안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이를 청중들과 공유하는 방식이다.
그 프로그램이 큰 매력을 지녔던 이유는 패널들 사이의 토론이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는 패널들 사이에 논쟁이 조금이라도 뜨거워지면 마치 무슨 큰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사회자가 상황을 제압하고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지만, 독일의 그 토론 프로그램은 대체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발언을 제지하기 위해서 말을 시작했는데 상대방은 말을 그치지 않아서 결국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계속하게 되는 상황이 꽤나 자주 연출되었다. 사회자도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고, 청중들 그리고 시청자들도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활기차면서도 진지한 논쟁은 그 자체로 충분히 유쾌하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매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상대방의 얼굴에 대고 계속 무엇인가를 열렬히 외쳐가며 열띤 분위기를 연출하다가 그 중의 어느 한 사람 혹은 사회자가 불쑥 농담을 던지곤 했는데, 그러면 청중들과 현장의 그 모든 당사자들이 스튜디오가 떠나갈 듯 기분 좋게 박수를 치며 웃어댔다. 엄숙함에서 유쾌함으로 혹은 긴장에서 이완으로 넘어가는 이 전환은 항상 너무 빠르고 극적이어서, 이방인인 내 눈에는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 웃음이 천천히 가라앉고 한 사람이 말을 시작하고 상대방이 이를 제지하고, 원래 말을 꺼냈던 사람은 자신의 말을 그치지 않아서 결국은 얼굴을 붉히면서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상황이 다시 연출된다. 그러다 누군가 다시 농담을 꺼내 스튜디오가 웃음바다가 되고, 이런 장면이 몇 차례 반복되고 나면 사회자의 마무리 멘트가 흘러나왔다.
격렬한 비판과 유쾌한 웃음이 동거하는 일, 그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다. "비판의 본질적 정념은 분노이다"라고 말했던 사람은 마르크스였던가. 고백컨대 나는 비판과 분노, 혹은 논쟁과 비난을 서로 엄격히 분리하는 데에 여전히 익숙하지 못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한 사람과 그의 말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을 힘겨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언어를 공격하면서 그 사람을 동시에 공격하게 되고, 그러면서 많은 경우에 처음에는 단순했던 논쟁이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내면서 끝나게 된다.
사실 언어와 정념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하는 이유는 그 둘 모두를 위해서 그러하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서는 올바름에 대한 언어적인 다툼은 불구가 되기 쉽고, 수사학적 정확성에만 집착하다보면 지금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도대체 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문맥 없이 흔들리면서 쉽게 길을 잃는다.
격렬하게 논쟁하면서도 흔쾌히 서로 웃을 수 있을 때 아마도 우리는 성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 사회는 더욱 성숙할 것이고, 우리가 소망하는 더 지혜로운 민주주의도 거기에서 천천히 자라날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비판적이고 맹렬한 진리에의 공방을 벌이면서도, 한편으로 유쾌하고 가볍게 그 옆을 스쳐 지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모든 소동과 말썽도 결국 모두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일 테니까. 그리고 웃음과 기쁨으로 매순간을 채워도 우리 삶은 너무 짧을 테니까.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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