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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말, 신뢰의 말

입력
2013.01.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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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다'는 뜻의 영어 'You have my words'라는 문장을 볼 때마다 참 흥미로운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자 그대로 풀면 '당신은 내 말을 가진다'이다. 약속은 지킴을 전제로 하는 엄중한 행위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기로 약속한다 해서 약속대로 행한다는 보장은 없다. 상대방이 굳이 보장을 요구한다면, 나는 "약속을 지키기로 약속할 게"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또 보장을 요구하면, "약속을 지키기로 약속한 것을 지키기로 약속할 게"라고 해야 한다. 말로 하는 약속은 이런 악순환을 내포하고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인간은 계약서를 만들고 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위의 영어 표현에는 말 자체에 법의 힘을 주는 듯한 뉘앙스가 있다. 너무 과잉해석일까? 하지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도 있는지라 필자는 'You have my words'에 뭔가 영미문화 혹은 서구문명 전체의 비밀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공상해본 적도 있었다. 법의 힘을 가지는 말, 이에 대한 강한 신뢰. 이런 정신을 엿보았던 것이다.

서구에서 추천서가 중시되는 데서도 이와 유사한 정신을 본다. 미국에서 입학이나 취직을 할 때 추천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마 추천서의 중요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유명한 199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존 내쉬의 경우일 것이다. 내쉬가 1948년 프린스턴대 대학원에 들어갈 때 그의 지도교수였던 카네기기술대(현재는 카네기멜론대) 더핀 교수는 단 한 줄의 추천서를 써주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천재입니다.' 내쉬의 '스펙'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지만, 이 추천서에서 우리는 엄청난 말의 힘과 그에 대한 신뢰를 본다.

우리나라에서도 추천서가 중요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요식행위에 가깝다. 피추천인에 대한 솔직한 평가보다는 입에 발린 칭찬 일색이어서 신뢰성과 권위가 없다. 미국 대학들에서는 한국 유학생의 추천서를 잘 믿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말의 긍정적 힘이 갈수록 퇴화하고 있다. 최근의 우리 정치는 한 술 더 떠 말을 학대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정말 말 많은 시대가 되었다. 트위터가 등장한 후에는 단 한 마디의 말이 여론을 움직이기도 한다. 온라인 정치에서 더 나아가 원라인 정치, 곧 한 줄 정치가 되고 있다. 이 인터넷 정치에는 건전한 토론도 있지만 말 폭력이 심각하다. 지혜를 압축한 말들, 내실이 꽉 찬 말들보다는 과장, 증오, 질시, 비아냥의 말들이 지배적이다. 이런 말들은 말하는 이의 속풀이는 될지언정 상대방을 설득시키지는 못한다.

의회민주주의의 핵심은 겸손하고 설득력 있는 말이다. 내 주장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겸손함, 하지만 지금은 최선을 다해 내 입장을 피력하겠다는 자세이다. 겸손하지 않은 말, 설득을 포기한 말은 아무리 많이 내뱉어도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않는다. 한국 의회민주주의에서 말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도덕적 악으로 간주하고 저주를 퍼붓는 말이다. 그래서 말이란 원래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지만, 요즘은 자기편에게만 하는 셈이다. 상대 진영에 대한 증오를 공유하면서 우리 진영을 강화한다. 말은 많지만, 대화가 없고 설득과 신뢰도 없다.

재작년 미국에서 기퍼즈 하원의원이 피격 당하고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추도연설에서 상대방에 대한 정중함을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상대방을 도덕적 악으로 규정하는 증오의 말들을 중지하자는 메시지였다.

우리 사회의 정치인들, 그리고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정치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이제 비아냥과 증오의 말들을 거두어야 한다. 말의 긍정적 힘을 회복하고 신뢰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정치적 언사의 변화일 것이다. 온갖 말들이 쟁투를 벌인 후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착하고 좋은 말이 많은 사회, 말이 천금처럼 여겨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권기돈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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