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대통령 선거전의 막이 오르기 전에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가까이에서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짧은 시간에 이뤄진 단편적인 관찰이었지만 박 후보는 듣던 것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낯선 사람과 환경 속으로 스스럼없이 들어가 어울리고 섞이려 했다. 물론 선거를 의식한 의도된 행동이었기 때문인지 어색함이 묻어나긴 했다. 하지만 박 후보의 언행들은, 그것이 자각의 결과든 참모진의 고언을 수용한 결과든, 그가 자신의 단점을 고치고 보완하려는 것처럼 비쳤다. 그렇다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는 어떨까. 지금 그는 자신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들을 고칠 마음이 있을까.
박 당선인은 원칙을 중시하는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정치적 고비를 헤쳐왔다. 그리고 대부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세종시가 대표적이다. 이명박 정부가 계획 수정을 추진했을 때 박 당선인은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원안 추진을 고수해 관철시켰다. 이번 대선 승리의 주요 요인 중 하나인 충청권의 지지도 따지고 보면 박 당선인의 '원칙 정치'가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과 소신의 긍정적인 측면만 본 것이다. 원칙과 소신은 의지, 결단력, 신뢰 등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동시에 독선, 불통, 경직과 같은 상반된 이미지도 떠올리게 한다. 원칙과 소신에 너무 집착하면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거나 자기 생각만 고집하게 되고, 결국 융통성과 유연함이 부족하고 독선적이라는 평까지 받기 쉽다. 요즘 가장 강조되는 '소통'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박 당선인이 고수하는 원칙과 소신이 자칫 독선과 집착의 삐딱선을 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극우 논객 윤창중씨가 당선인 수석대변인으로 깜짝 임명됐을 때 현실화했다. 급기야 돈봉투 수수 처벌 전력자, 상습적으로 대금 지급을 늦춰 하도급업체를 괴롭힌 게임업체 대표 등이 인수위 청년특별위원으로 임명됐다. 윤 대변인의 밀봉봉투 개봉 세리머니는 박 당선인의 인사 비밀주의 원칙에 대한 고집과도 같은 집착을 엿보게 한 한편의 코미디였다. 그럼에도 어제 인수위원 발표 때까지 인사 비밀주의 원칙은 유지됐다. 소통은 없었고 깜깜이 인선은 계속됐다. 대변인들은 보름 넘게 기자들에게 "아는 바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측근 중 누구도 박 당선인에게 인사논란에 대한 입장이나 인사에 관한 의중을 '감히' 묻지 못했다. 대변인은, 적어도 박 당선인에겐, 밀봉봉투나 뜯기만 하면 되는 존재였다. 보름 넘는 기간 동안 국민과 박 당선인은 소통 단절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인수위의 기구적 성격과 기능만 감안하면 누구를 인수위원으로 뽑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수위 활동에 적합한 전문성과 능력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하자나 흠집은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향후 이어질 새 내각과 권력기관장, 청와대 참모진 인선이다. 이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인사 비밀주의 원칙만 작동한다면 새 정권에 두고두고 부담이 될 일이 남을 수 있다. 현 정권이 '강부자' '고소영'정권으로 규정된 것이 새 정부 출범 직후고 이후 정권과 국민의 간극이 크게 벌어진 점을 박 당선인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판단 착오나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착오와 실수에서 배우고 개선하지 않는 정권은 국민의 외면을 받기 마련이다. 유연한 자세와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박 당선인의 대통합과 탕평의 정치는 개방과 소통이 전제된 인사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인선 구상에 대한 세간의 반응과 평가, 언론의 검증을 예방주사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촉새가…"라는 말로 주위를 얼어붙게 만들고 세상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종전의 언행은 용도 폐기할 때다. 최고 권력자라면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부작용과 단점을 헤아리고 없애려는 의지와 실천도 필요하다. '깜깜이 인사'는 인수위원 인사로 족하다.
황상진 부국장 겸 디지털뉴스부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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