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자살 추적하던 주인공18세기말부터 인류 공격한 정신기생체 알아내 맞서고현대의 정신적 집단병리현상 의식과 SF문법으로 풀어내
1994년 저명한 실험심리학자 카렐 바이스만이 '이유 없는'자살을 감행한다. 그는 유서를 통해 자신이 남긴 원고 일체를 오랜 친구인 고고학자 길버트 오스틴에게 전한다. 오스틴이 펼쳐 읽은 유고(遺稿)의 첫 문장. "몇 달 전부터 나는 인류가 심암(心癌)이라고 할 만한 것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심암을 20세기 특유의 정신적 불안쯤으로 대충 이해한 오스틴은, 하지만 원고를 읽어나가면서 그것이 의식의 심층부에서 영혼을 공격하는 모종의 '실체'를 지칭하고 있음을, 친구의 자살 역시 심암의 공격에 의한 사실상의 타살임을 점차 납득하게 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인류는 역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 셈이다.
의 저자 콜린 윌슨이 1966년 발표한 이 SF소설은 일단의 과학자들이 인류의 내면에 기생하는 심암, 곧 정신기생체의 실체를 규명하고 그에 맞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바이스만의 글에 따르면, 정신기생체의 공격은 18세기 말 근대의 서막이 열리면서 본격화했다. 전(前) 세기 창조성의 시대가 갑자기 곤두박질치면서 신경증과 자살률이 급증했다. 광기와 같은 잠에서 깨어나면 제 정신을 회복하듯 인류는 그간 문명의 동력을 지탱했던 자기재생능력을 급격히 잃어갔고 특히 창조적 인간들이 자살을 하거나 자기파멸적 광기 등에 사로잡히게 됐다는 것이다. 섈리 키츠 포 횔더린 호프만 쉴러 니체 고흐 베를렌 로트레아몽…. "18세기의 위인 중 자살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가? 그들의 삶은 19세기인의 그것 못지않게 가혹했는데 말이다.(…)근대인은 에 공명한다."(104쪽)
SF작가, 나아가 소설가로서의 콜린 윌슨의 진가를 알린 이 작품은 그의 주저 의 문제의식의 SF적 변환ㆍ확장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가 19세기 예술에서 드러나는 일탈적 인간상의 분석을 통해 아웃사이더 예술가들의 지위와 지향을 정립하고자 했다면, 이 소설에서 윌슨은 정신기생체라는 과학적 상상력의 장치를 개입시켜 어두운'19세기적 현상'을 이야기하며 미래를 전망한다.
정신기생체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들과 맞서 싸우고, 근원을 탐색하는 과정은 이 작품 전후의 다양한 작품들이 구축해온 SF적 문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타자가 우리의 '정신' 곧 내면이라는 점, 지난 세기의 경험을 토대로 하면서 현재(2013년)를 기점으로 전후 10~20년을 시대배경으로 상정했다는 점 등은 SF에 덜 친숙한 독자라도 낯설지 않게 작품을 즐길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훗설의 현상학, 융의 집단무의식 등 작품 안팎에서 거론되는 철학적ㆍ서사적 배경들은, 그 맥락을 잘 이해하면 물론 좋겠지만, 윌슨 특유의 현학적 장치라 여기고 우회해도 무방할 듯하다. 의식의 무한한 진화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신뢰와 낙관에 동의하든 않든, 아직 해법을 찾지 못한 현대의 정신적 집단 병리를 의식의 다면성과 잠재력에 천착해 전면화하고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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