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눅눅함이 늘 '똬리' 틀어박혀 지낸다는 격리감 불구 그나마 아늑한 아지트 역할도몽상가에겐 이성의 폭력 피하는 변덕스러운 욕망의 해방구파티룸·음악감상실 등 변신 다양한 활용으로 새삼 부각도
습한 어둠 사이로 드러나는 어수선한 잿빛 공간. 천장을 받치는 굵은 철제 빔들이 군데군데 보이지만 역시 어둠 탓인지 전체적인 구조는 파악할 수 없고, 공간을 구획하는 벽들 역시 가설무대의 일부처럼 허술해 보인다. 그리고 추저분한 옷차림의 사람들. 경보장치인지 표지판인지 모를 불빛들을 따라 미로처럼 얼기설기 이어진 통로 위를 유령처럼 오고 간다.
아마겟돈의 전쟁이나 재난을 겪어서일까. 아니면 사이보그와 같은 인류 문명 혹은 미지의 우주침략자에 의해 지구를 정복당한 것일까. 할리우드 SF영화들에 세뇌 당한 탓인지, 어두운 상상력의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는 모르지만, 그 곳이 미래 지구의 어느 지하도시라는 사실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공상 안에서, 지하 공간은 생명의 마지막 피난처다. 지상에서 내쫓겨, 태양과 비와 바람의 조력 없이 오직 인간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마련한 배수진의 거처. 할리우드 영화 속 어떤 영웅이 등장하기 전에는 지상의 문명을 회복하기란 가망 없어 보인다. 대신 인류는 땅 속을 집요하게 파헤치며, 마치 지상 문명의 거울상 같은 그럴싸한 지하문명을 건설할 지 모른다. 인공 태양 등 획기적인 에너지원을 개발하고, 좀 더 넓고 아늑하고 쾌적한 공간들을 차지하기 위해, 또 서로를 차별화하기 위해 노동하고, 지배하고, 때 맞춰 선거도 치르게 될 것이다. 오존층 파괴를 걱정하듯 맨틀의 범람을 우려하면서…. 어쨌건 지하는 우리의 인식처럼 죽은 자의 오늘과 산 자의 미래 공간인 동시에, 그런 공상 안에서 미래를 살아갈 자들이 깃들일 마지막 삶의 공간일지 모른다.
지하 공간은 현실에서도 그다지 반가운 공간은 아니다. 문명의 지구본, 풀어 말해 인류의 경제사회적 계급계층의 분포를 함의한 입체 지도를 만든다면 지구는 원만한 구형(球形)이 아니라 자연의 먹이 피라미드들처럼 촉수를 돋운 별 모양의 박테리아 무리의 형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피라미드의 상층부일수록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고, 주춧돌처럼 딛고 선 지하는 거의 늘 경제적 약자들의 공간이다.
구조적으로 지하층은 건축물의 안전성에 간여하는 필수 공간이다. 지하 공간은 고강도 콘크리트를 사용한 박스구조로 매설돼 암반처럼 건물을 지탱한다. 지반의 깊은 위치에서 건물을 붙듦으로써 지표 주변의 외적 충격을 완화하거나 차단한다. 건축물이 높아질수록 지하층은 깊어지기 마련. 그때의 지하 공간은 빌딩의 운영 설비나 주차시설 등 지상의 삶의 편의를 북돋우는 공간이 된다.
주택의 경우 지하실은 잉여의 공간이다. 현행법상 지상 2층 건물을 지을 경우, 지하층의 천정이 지반면보다 1미터 이상 위로 솟지 않으면 건평만큼의 지하층은 용적률 제한에 걸리지 않는다. 3,4층 높이의 다세대나 다가구주택의 (반)지하 공간들이 거의 그런, 건축법이 덤으로 허용한 공간이다. 늘어나는 수도권 주택 수요를 충당할 목적으로 합법화한 지하(반지하) 주택은 현재 약 60만여 가구(140여만명). 이들 가구의 상당수가 헌법이 보장한 권리(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제35조))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주거복지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안전 건강 등 최저주거기준의 관점에서 지하 주거환경의 전면적 개선과 신규 공급 억제를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 같은 변화가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될 주거부담의 증가에 대한 대책도 함께 고민돼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주거공간으로서의 지하층의 최대 단점은 채광과 습도다. 창이 아예 없거나 옹색해서 늘 어둡고 눅눅한 데다 환기도 마땅찮아 곰팡이 등 실내 오염에 취약하다. 그 환경이 인체의 건강과 가구 등 세간의 내구성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하다.
그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지하층은 지상층이 누리지 못하는 적지 않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기온의 변덕에 덜 민감해 에너지를 덜 쓰고도 여름과 겨울을 날 수 있고, 활동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창 없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은 단점인 동시에 벽면공간 활용 면에서는 장점이다. 지하층을 파티룸이나 음악감상실 같은 여가 공간으로 적극적으로 꾸민 고급 주택도 드물지 않거니와, 근년에 지어지는 서민들의 반지하 공간들은 철제 담장을 두른 유럽의 오래된 도로변 빌라 지하층들처럼 '드라이 에어리어(Dry-Area)'라는 지하 발코니 공간을 둬,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지키면서 채광과 개방성을 보완한다. 그 공간을 미니 정원처럼 개성적인 장식 공간으로 활용하는 예도 흔해졌다.
근년 들어 홍익대 주변 등 일부 지역의 주택가 (반)지하층이 카페나 상점 등 경쟁력 있는 상업 공간으로 급속히 변신하고 있는 데는, 물론 저렴한 임대료 등 경제적인 요인에 의해 촉발된 것이겠지만, 지하 공간만이 지니는 저 같은 장점들도 적잖이 기여했을 것이다. 1층 상가들의 시각적 어지러움과 거리의 소음들로부터 거리를 둔, 숨겨둔 아지트 같은 아늑함. 그 아늑함은 한적하면 한적한 대로, 복작댄다면 또 복작대는 대로 묘한 정감을 선사한다. 거기에 백지처럼 두른 창 없는 사방 벽 위에 발휘된 독창적인 꾸밈들. 창이 있다면, 실내에 있는 이는 자신의 머리 위로 열린 창을 통해 거리의 풍경을 올려다보게 될 것이고, 행인들은 무릎 아래로 얕게 열린 창을 통해 지하의 밝은 실내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창이 허락하는 깊이만큼만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공간의 안과 바깥의 시선들이 색다른 시각으로 낯설게 얽히고 설키는 경험은 반지하 공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작은 시각적 모험이다.
그 느낌들은 물론, 지하 공간이 지니는 폐쇄성과 격절감에 대한, 지나치게 호의적인 해석일지 모른다. 우리의 관념 속 지하 공간은- 어쩌면 지하공간 일반의 현실일수도 있지만- 역시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19세기에 떠올렸던, 어둡고, 더럽고, 자폐적이고, 절망적이기까지 한 몽상가의 공간, 부적응자의 공간에 가깝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라는 도발적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의 에서 지하실은 중년의 자폐적 몽상가가 "사는 게 아니라 틀어박혀" 지내는 생활 공간이자, 외롭고 고통스러운 내면의 상징 공간이다. 그에게 지하실은 세상의 질서나 윤리, 이념 가치 등으로부터 비껴선 공간, 그럼으로써 자신(또 자신의 내면적 가치)을 지켜주는 옹색하지만 굳건한 성채 같은 공간이다. '마루바닥 밑 쥐구멍으로부터의 수기'라는 원제처럼, 그 곳은 늘 음습하지만 동시에, 철학자 박이문의 해석처럼 "피상적 세계의 본질을 거리를 두고 조용히 관찰하고 조명할 수 있게 해주는, 그래서 예리한 반성을 이끌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남자는 19세기 중엽의 러시아를 사로잡았던 이성과 합리와 과학적 세계관, 공리적 가치관, '수정궁'으로 상징되는 근대 문명의 미래에 대한 동경과 신뢰를 비웃는다. 그는 "출구가 없다는 것,(…)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낄 때" 누릴 수 있다는 '절망의 쾌락'을 강변하기도 한다.
-만일 욕망이 이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게 된다면, 그때 명백히 우리는 사고할 것이고 욕망을 갖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이성을 잃지 않고서는, 비정상적인 어떤 것을 원한다든가, 이성에 어긋나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어떤 것을 알면서도 바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인간의 사유 능력만을 만족시켜 줄 뿐이다. 반면 욕구라는 것은 삶의 모든 국면들의 표현이다.(…) 나는 살기 위한 나의 총체적인 능력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고 싶지, 살려는 나의 총체적이 능력의 사소한, 아마도 20분의 1에 불과한 사유능력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살고 싶지 않다.(…) (어떤 변덕스러운 욕구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에도, 유익함에 대한 우리 이성의 가장 납득할 만한 결론들과 모순되는 경우에도 (그 변덕스러운 욕구가) 모든 유익들보다 더 유익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즉 우리의 인간성과 개성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열린책들, 471~473쪽)
인간적 삶이란 매 순간, 설사 가죽이 벗겨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이 톱니바퀴가 아니라 인간임을 스스로에게 입증시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믿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남자가 "내가 아직 살아 있고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무릎을 꿇지 않겠다. 내게는 지하실이 있다"고 할 때, 그에게 지하실은 '2+2=4'라는 차가운 이성의 폭력을 모면할 수 있는 피난처이자 변덕스러운 욕망의 해방공간이다. 요컨대, 150년 전 대문호의 저 문장 안에서 지하실은 작품의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잉태하고 떠받치는 지반이다. 그의 음습하고 자폐적인 지하실은, 그렇게, 사회적 약자들이 스스로를 지키며 나약한 독백의 형식으로나마 절규할 수 있는 (역시)마지막 삶의 공간으로 활짝 열린다. 근년의 트위터 공간 속에서 우후죽순처럼 번졌던 다양한 '대나무숲'들처럼. 그럼으로써 100년 뒤 200년 뒤를 겨냥한 저 SF적 상상의 편린들- 삶의 공간이자 저항의 공간-과 아스라히 교감한다. 지하는 우리에게 그런 공간이다.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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