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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하나라도 덜어 준다면

입력
2013.01.01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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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하나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는 말이 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짐을 지고도 뜨거운 사막을 거뜬히 건너가는 동물이 낙타다. 아무리 보아도 무게라곤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 깃털 하나가 등짐에 더 얹히는 바람에 그 튼튼한 낙타의 허리가 부러진다는 얘기다. 거꾸로 힘에 겨워 부러져가는 낙타의 등에서 깃털 하나만이라도 덜어내 주면 목숨을 잃지 않고 함께 사막을 건너 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사회양극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밀려나온다.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좀 더 풍족한 쪽에서 좀 더 미흡한 쪽을 향해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데서 사회적 화해와 통합의 물꼬는 시작될 수 있다. 몇 가마니의 깃털더미라도 무게를 느끼지 않는 쪽이 있는가 하면 단 한 개의 깃털조차 더 이상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엎어지고 드러누워야 하는 쪽도 많다.

지난해 서울의 한 지역자활센터에서 수개월 동안 실습을 받은 적이 있다. 아침저녁 두어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고, 한나절 혹은 종일 보조활동을 하기도 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역자활센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조차 그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희망 리본 프로젝트'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에 희망의 리본을 다는 일' 정도로 짐작했었는데, 리본이 그 리본(ribbon)이 아니라 'Re-born(다시 태어남)'의 의미라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국가가 기초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저소득빈곤층은 아니지만 스스로 생활을 유지하기 힘겨운 사람들(차상위층)을 주된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들에게 근로능력을 키워 주거나 일자리를 갖도록 각종 교육과 사업을 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약 8만4,000명 정도가 시ㆍ군ㆍ구 지역자활센터 247곳에 참여하고 있다. 2000년부터 보건복지부 중심으로 시행하고 있으나 기초생활보장대상자도 아니고, 서민과 중산층에도 포함되지 못하니, 정치적 사회적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지난달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2층 소강당에서 한국일보가 후원한 자활정책토론회가 있었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캠프의 '차기 정부 정책방향'을 들어보는 자리였다.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의 전문위원을 초청해 자활정책에 대한 당 차원의 방향을 듣고 자활센터 관계자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하지만 어느 정당도 자활정책과 관련한 공약들을 제대로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새로 건립된 국회의원회관, 규모와 시설이 웅장한 신관 2층 회의실에 참석한 대표 전문가들은 "미처 준비가 안 돼 미안하다"는 말로 토론을 시작했다. 대선을 불과 열흘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새누리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당과 진보당 쪽의 전문가들조차 원론적 언급 이상의 정책은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날 토론회 장소를 메운 사람들은 대부분이 지역자활센터 관계자들과 자활도움을 받고 있는 차상위층 사람들이었다. 토론회의 결론은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는 정도였고, 나아가 사회운동이나 지역공동체활동으로 확산되었으면 좋겠다는 공감대를 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별다른 의미 없이 끝난 듯하여 주최하고 후원했던 쪽으로선 그 곳까지 불렀던 참석자들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는데 그들의 반응은 전혀 의외였다. 언론과 정치권에서 자신들의 일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너무나 감사하게 여겼으며, 자활사업이란 문제를 그들 이외의 사람들이 논의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희망을 얻었다고 말했다.

리본(Re-born)의 희망을 갖고 힘겹게 세상을 건너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지역자활센터에 소속돼 함께 하는 경우는 그나마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조각의 힘겨움만 더해진다면 허리가 부러질 수밖에 없는 삶이 우리 주위엔 숱하게 많이 있으며, 지금 혹은 언제라도 우리 자신의 삶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의 등 위에 하나의 깃털이라도 더 얹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누군가의 허리에서 하나의 깃털이라도 덜어주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병진 주필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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