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는 영토 분쟁 등으로 2012년 유례 없는 갈등을 경험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 한국, 중국, 일본의 최고 지도자가 한꺼번에 바뀌면서 동아시아의 화해와 안정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한중일의 전문가들로부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제언을 들어본다. 첫 회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그는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주변 국가를 배려하는 쪽으로 정치 방향을 틀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6자회담의 재개가 시급하며 민간 차원의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도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한국, 일본, 중국은 물론 러시아에서도 새 정부가 출범했다. 이 지역의 권력이 한꺼번에 바뀐 것은 이례적이다. 권력의 변화가 지역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2011년 말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등장을 필두로 지난해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이 부활했고 한중일 3국에서도 권력이 바뀌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한 미국도 국무장관이 바뀌니 변화가 있을 것이다. 교체된 한중일 3국의 권력자들이 위기적인 대립과 긴장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립의 급진화와 극도의 긴장상태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렇게 해온 역사적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의 근본 원인을 없애고 평화로운 협력 관계를 만들지는 새로운 협력 관계 발전을 위한 노력의 여부에 달려있다."
우익 성향의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 개정 등 이웃 국가들을 긴장시킬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다. 아베 총리가 임기 동안 이런 공약들을 이행할 수 있다고 보는가.
"자민당이 일본 총선에서 승리한 것은 민주당의 미숙하고 무책임한 통치와 당내 상황 조차 수습할 수 없는 무능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일본 국민 다수가 우익 성향이어서 아베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아베 자신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베의 심중에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신념에 따른 정치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 부활한 자민당 정권의 중심 인물로서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다투고 있다. 당분간은 후자를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미국은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재해석하려는 아베 정권의 움직임을 환영하고 있지만 한국, 중국과 대립한 상태에서 진행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 할 경우 미국은 아베 정권을 정면 비판할 것이다. (여성인) 박근혜 대통령의 등장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퇴행을 막을 계기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와,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한 무라야마 담화의 수정 등은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 헌법도 (헌법개정 요건을 명시한) 96조는 개정하려 하겠지만 (군대 보유와 전쟁을 금지한) 9조의 개정은 착수조차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베 정권은 무라야마 담화는 계승하겠다고 하고도 고노 담화의 계승 여부에는 분명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의 우익이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의 일부 세력은 위안부를 매춘부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일본 정부와 국민이 위안부 문제에 책임을 느끼고 사죄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리어 화를 낸다. 이들은 일본의 공식 입장에 도전해 어떻게 해서든 역사를 역행시키려 한다.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아시아여성기금 등 일본의 공식 입장을 이들로부터 지켜내는 데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일본 총선에서 자민당이 승리한 것이 보여주듯 일본 정치가 극우로 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일본뿐 아니라 주변 국가에서도 흘러 나오고 있다. 일본 정치의 우경화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의 우경화가 그리 단순한 현상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온 것, 오키나와를 비롯한 수많은 기지를 미국에 제공하고 자국의 안전 보장을 미국에 맡긴 것에 근본 원인이 있다. 이런 현상을 보며 제 나라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부상한 것이다. 냉전시대는 미국의 편에서 일을 진행시키는 게 숙명이었지만 냉전이 종식된 이상 미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었다. 그래서 미국이 억눌러온 헌법을 개정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군대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가 고개를 든 것이다. 이런 과정을 우경화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더 나아가 일본의 침략전쟁을 긍정적으로 바라 보고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참전하는데 찬성함으로써 기존의 논의 전체가 무용지물이 돼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극우화를 막기 위한 방법이 있나.
"단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극우화는 불가능하다. 과거 일본은 50년간 전쟁을 지속하며 조선을 식민지화했고 중국을 침략했다. 그때 천황제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극우 체제가 성립됐다.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과 중국을 지배하고 침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중국도, 한국도, 북한도 일본의 침략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본이 극우화해도 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일본은 이미 67년 동안 전쟁을 한 적이 없다. 우익화든 극우화든 일본은 스스로 고립되고 자신을 상실하고 내부붕괴 할 것이다."
중국은 시진핑 총서기가 취임하면서 중화사상을 강조했다.
"중국은 근ㆍ현대에 들어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침략을 받아 망국의 위기를 경험했다. 신중국이 성립하면서 망국의 위기는 사라졌지만 공산당 체제 아래 오랜 기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개혁개방정책이 도입된 이후 공산당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군비도 증강했다. 하지만 빈부의 격차, 부정부패 등의 모순 또한 함께 발생했다. 공산주의 사상이 자취를 감추면서 중국의 국가 사상으로 중화민족주의만 남게 됐다. 중국은 큰 문제를 떠안고 있는 거대 국가다. 어떻게든 이런 문제와 모순을 해결해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주변국의 조언과 협력이 필요하다. 한국은 현대 민주 혁명을 실현한 국가로서 중국에 조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침략의 역사를 중국이 반면교사로 삼아 일본과 똑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충고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탄생할 예정이다. 동아시아의 화해를 위해 한국의 새 정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일본 정부에 더 강하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 단체가 내놓은 해결안을 아베 정부가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것이 좋겠다. 지금도 피해자 할머니들이 차례차례 세상을 떠나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는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대북 정책에서는 일본 정부가 (북일)대화를 진행시킬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협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동아시아 갈등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며 갈등 해결을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가장 큰 원인은 북한과 미일의 관계가 정상화하지 않은 것이다. 두번째는 남북간의 긴장이고 세번째는 북한, 중국, 일본의 내정 문제다. 네번째는 독도, 센카쿠 열도, 쿠릴열도 등 3개의 영토 문제이고 마지막은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문제다. 한일 관계만 놓고 보자면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식민지로 지배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식을 확립하는 것이 양국관계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일 영토 문제 등으로 야기된 갈등이 경제ㆍ문화 등 민간 교류의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양국 국민 사이에도 상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다. 갈등 해소를 위해 민간 차원에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2015년은 한일기본조약 체결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때까지 한일 역사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고 북일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해결책으로는 동아시아공동체,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등 다양한 구상이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 현재 존재하고 있는 6자 협의를 재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6자 협의를 동북아 6개국의 상설협의체로 만들고 여기서 군축 문제도, 영토 문제도, 역사 문제도 논의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민간차원에서 6개국 협의체를 만드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193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960년 도쿄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동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소련사와 남북한 현대사를 연구했으며 한국에는 북한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진보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학자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 지원, 재일한국인 사회적 처우 개선, 전후보상 문제 등에 적극 참여했다. 1995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사죄와 배상을 담당하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여성기금' 창설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2010년 한일지식인 214명이 발표한 한일병합 무효선언을 주도했다. 2010년 김대중 학술상, 2012년 제8회 비무장지대(DMZ) 평화상을 수상했다.
도쿄=글ㆍ사진 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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