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여름 강원도 정선에 있었다. 며칠 뒤 방송국 팀이 찾아왔다. 종일 주변을 뱅뱅 돌던 PD가 말을 건넸다.
"힘들죠."(PD) "그럼요." "어떻게 오셨어요."(PD) "일하러요." "부모님은."(PD) "지방에." "힘드시겠지만 예전 노숙 생활이 어땠는지."(PD) "네?" 듣고 있자니 PD는 취재기자를 취재대상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당시 기자는 산림청의 숲 가꾸기 공공근로사업 덕에 노숙의 기억을 털고 일터를 얻은 자활영림단을 취재하고 있었다. 200자 원고지 15매가 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산에 있다. IMF 한파에 밀려 직장과 가족, 삶을 송두리째 잃고 거리로 내몰렸던 가장들, 철면(鐵面)을 쓰고 차디찬 지하철역사 귀퉁이에 몸을 부렸던 중년들이다.
그들은 숲을 가꾼다. 덩굴을 쳐내고 쓸모 없는 나무를 베는 일은 매운 세파의 채찍에 짓이겨진 자신을 가꾸는 일이다. 땀을 흘리고 돈을 벌고 그래서 희망의 싹을 심는 작업이 올해로 4년. 그들은 더 이상 노숙자도 실직자도 아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PD는 "단원인 줄 알았다"고 머쓱해했다. 하긴 길도 없는 해발 900m 야산을 함께 올라 일하고, 좀체 말을 섞지 않는 단원들과 서슴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농을 주고받는 폼이 영락없는 단원이긴 했다.
마음 속에 진짜 아픔을 품고 사는 이들은 허투루 자기 얘기를 하지 않은 법이다. 꼬치꼬치 캐묻는 작자가 단물만 홀랑 빨아먹으려는 외부 관찰자라는 직감이 오면 등을 돌리기 일쑤다.
그래서 기자는 일찌감치 취재수첩은 가방 속에 넣어두고 내부자로 변신해야 했다. 함께 TV 보며, 약초 다듬으며, 땀 흘리며, 작업용 트럭에 기름 넣는 심부름도 자처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가자 시나브로 그들의 말문이 트였다. 한 단원이 애지중지하던 과실주까지 선물 받았다.
그렇게 1년 가량 전국을 돌며 취재(전국패트롤)를 했다. 내부자가 되려고 "모기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촌(전남 해남군)에선 모기한테 며칠 밤 원 없이 물려봤고, 님비(Not In My Backyard)에 찌든 세상과 달리 너도나도 쓰레기소각장을 유치한다던 마을(전남 무안군)에선 동네 야간회의마다 일원으로 참석해 훈수를 뒀다. "기자 같지 않다"는 농을 칭찬으로 여겼다.
엉덩이가 무거워질 무렵인 2010년 희한한 책을 만났다. 이름마저 거창한 '암행기자 귄터 발라프의 언더커버 리포트(첩보 보고서).' 킥킥대며 읽다가 종국엔 머리털이 파르르 떨리는 충격을 받았다.
강수돌 교수는 '이해를 돕는 글'에서 "대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노동현실을 숨김없이 밝혀내고 사회적 불의와 모순을 고발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온 저자는 외부 관찰자가 아닌 내부자로 변신해 그들과 함께 살았다. 요컨대 위로부터의 시각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시각, 외부인의 시각이 아니라 내부인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썼다.
늘 꿈꿔왔으나 수박 겉핥기에 그쳤던 기자는 부끄러웠다. ▦유럽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 ▦거리의 노숙자 되기 ▦대형마트 납품업체의 비밀 등 7개 주제로 구성된 취재기는 부러움 자체였다. 더구나 그가 65세 때 취재한 내용이라니 더더욱.
책장을 덮은 뒤 사건팀장이었던 기자는 직접 현장에 나갈 수 없다는 핑계로 후배 기자들을 족쳤다. 엄동설한에 일주일간 노숙인 되기, 한 달간 피자 아르바이트, 폐지 줍는 노인 따라다니기 등. 관련 기사가 나왔고 간만에 흐뭇했다.
귄터 발라프의 첩보 보고서는 우리 언론 현실에선 아직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꿈마저 버릴 순 없는 노릇이다. 기자가 되길 희망하는 학생들, 초심을 집에 두고 다니는 기자들, 세상에 기자 같은 기자가 없다고 불평하는 독자들에게 권한다. 세계화와 신(新)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불편한 진실'을 날것으로 마주하는 덤도 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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