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작가 강석경(61)이 8년 만에 장편소설 (민음사 발행)을 냈다. 연극배우 윤미호가 그리스, 로마를 여행하며 쓴 여러 통의 편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작가 강씨가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던 다양한 주제들 -제도적 관습과 금기를 돌파하려는 존재의 갈등, 예술과 구원의 문제, 영원의 시간에 대한 갈망과 탐색- 을 다시금 환기시킨다. 문학, 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예술관, 윤리관이 맞물린 소설은 다소 고전적인 문체와 인물 탓인지 소소한 일화에 작가의 주제의식을 담았던 1980~90년대 여성작가들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편지는 그리스 트로이아에서 시작한다. 노년의 윤미호에게 '그리스는 정신의 고향 같은 곳'(10쪽)이다. 25년간 무대에서 연기한 '엘렉트라와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 페드라와 이오카스테, 트로이아의 노와이 헤카베'(10쪽)가 탄생한 이곳에 캐나다로 입양 보낸 아들 수보리도 있다. 미호는 아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길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지인들에게 서신을 띄운다. 신화학자 Y, 베드로 신부, 테레사, 수보리에게 보낸 편지는 기실 주인공 미호 자신을 향한 고백록이다.
윤미호가 대학을 졸업하던 날, 남편의 외도로 고통받던 그녀의 어머니는 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5ㆍ18로 대표되는 그 시절의 민주화운동 역시 미호를 비롯한 청춘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때부터 그녀는 방랑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고, 연극 무대의상을 담당하다가 첫사랑 J를 통해 배우가 된다.
인도 여행 중 만난 일본인과의 사랑에서 수보리를 낳은 그녀는 아이가 한국 사회에서는 소수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캐나다로 입양 보낸다. 동성애자였던 수보리의 양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고 고통 속에서 살다가 끝내 자살을 택하고, 수보리는 사제가 돼 로마로 건너간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을 아들로부터 간을 이식받은 후, 수십년 만에 재회한 미호는 아들과 만남을 앞두고 마지막 편지를 쓴다.
'생이 내게 가혹했다 할지라도 행복한 유인원보다는 불행한 소크라테스를 택할 거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 반문하고 번뇌하기 위해. 번뇌 즉 보리,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니 말이다.'(229쪽)
소설은 방랑자인 미호의 여행기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두고 바라봐야 하는 삶, 먼 곳을 향한 그리움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삶을 그린다. 작가는 트로이아 밀레토스 아테네 코린토스 미케네 올림피아 스파르타 델포이 베네치아 로마에 이르는 긴 여정에 온갖 예술가와 철학자와 성자들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펼치며, 미호 개인의 번뇌는 기실 시대, 세계와 맞물려 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감각과 직관이 발달한 배우가 이렇게 유려하고 이성적인 언어로 현실에서도 자신의 번뇌를 회고할 수 있을지, 이 은밀한 내면을 타인을 향한 언어(편지)로 고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예술과 삶의 본질을 '탐구'하고 '써'왔던 작가 강석경 씨가 젊은 시절 조각가에서 소설가가 된 것은 그러니까,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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