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물 무렵에는 말이 줄어든다. 왠지 줄여야 할 것 같아진다. 적어진 말수만큼 지나온 시간을 곰곰이 되돌아 본다. 무얼 했는지, 내 주변은 어땠는지, 언제가 기뻤는지 가슴 뭉클했는지 그리고 눈물 났는지.
한국이 세계 8위의 무역대국이 되고 삼성, 현대가 글로벌 기업으로 뻗어나가는 모습은 자랑스러웠다. 싸이가 세계적인 스타 대접을 받는 건 지금도 놀랍기만 하다. 성폭행범 이야기가 이틀 멀다 하고 신문을 도배할 때는 부끄러웠다. 신문에서 스스로 목숨 끊은 사람들의 사연을 읽을 때 제일 가슴 저리고 눈물이 났다. 새 정부가, 정치가,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들이 마지막 남긴 목소리가 나직이 가르쳐주는 것만 같다. 그들의 유서를 다시 읽어 본다.
학교 폭력을 견디다 못해 목숨 끊은 대구 중학생의 유서는 학교가, 교사와 학부모가 그리고 한국의 교육이 얼마나 해야 할 몫을 못하고 있는지 절실하게 보여주었다.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아빠 매일 공부 안 하고 화만 내는 제가 걱정되셨죠? 죄송해요. 엄마 친구 데려온답시고 먹을 걸 먹게 해준 제가 바보스러웠죠? 죄송해요. 형. 매일 내가 얄밉게 굴고 짜증나게 했지? 미안해. 하지만, 내가 그런 이유는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앞에서 밝혔으니 전 이제 여한이 없어요.…매일 남몰래 울고 제가 한 짓도 아닌데 억울하게 꾸중을 듣고 매일 맞던 시절을 끝내는 대신 가족들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그리고 제가 없다고 해서 슬퍼하시거나 저처럼 죽지 마세요. 저의 가족들이 슬프다면 저도 분명히 슬플 거예요. 부디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빌게요."
어버이날에는 경기 용인의 한 아파트에서 60대 부부가 같이 살던 아들 부부와 손자들이 여행 간 사이 목숨을 끊었다. 남편은 치매를 앓았고 부인은 병수발 중 암을 발견해 수술을 했다. 사건 현장에는 부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지 5장 분량의 유서가 남아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아버지, 엄마가 같이 죽어야지, 어느 하나만 죽으면 짐이 될 것이다"고 썼다. 며느리에게는 "고맙고 미안하다. 아들들 잘 키워라"고 하고 손자들에게는 "엄마, 아빠와 행복해라. 사랑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형제들에게는 "우리 자식들 고생했는데 잘 도와달라"고 했다.
부동산 가격 거품이 꺼지면서 깡통 아파트가 속출하자 빚 감당을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자꾸 생겨난다. 지난 달 충북 제천 도로변 승용차 안에서 50대 여성과 30대 두 딸이 연탄을 피워 놓고 숨진 채 발견됐다. 차 안에 있던 수첩에는 "아파트 채무와 사채 때문에 힘들다. 사채 때문에 지금 사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월세 보증금을 받아도 2,000만원 밖에 안 남는다. 오빠가 처분했으면 좋겠다.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노동자들의 자살이 줄을 잇고 있다. 목을 매어 세상을 떠난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의 유서에는 해고노동자들의 북받치는 울분과 분노가 절절하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자본.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 해고 노동자는 아파트 19층에서 몸을 던지기 전 "양심이 허물어진 삶은 의미 없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살고 싶습니다. 회사 폭력의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앓아왔지만, 그래도 자신의 원칙을 잃지 않고 살아왔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10년만에 성탄절이 순백으로 고요하다.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가슴에 새겨 본다.
김범수 문화부 차장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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