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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12월 24일]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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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12월 24일] 사이에서

입력
2012.12.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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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창고에서 책을 한 권 찾아 들어오려는데,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닫이문이 그렇듯 해마 모양의 걸쇠를 걸고리에 돌려 채우는 방식이니 안에서 저절로 잠길 리는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외출한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마땅치가 않았다. 휴대폰은 내 손이 아니라 방에 있었다.

문을 열려고 몇 번 더 힘을 쓰다가 그냥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춥다. 졸지에 베란다에 갇힌 신세라니. 안팎의 사이에 끼어버리다니. 남의 집을 엿보듯 유리문 안쪽의 내 방을 물끄러미 본다. 이 각도에서 찬찬히 바라보는 건 처음이지 아마. 빈 컵. 빈 의자. 말라붙은 귤껍질. 내가 빠진 나의 작은 세계. 조금 전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까마득해진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담 넘어 학교에서 종이 울린다. 교실 창문에서 두 개의 손이 불쑥 뻗어 나와 탁 탁 탁 분필지우개를 턴다. 칠판에 씌어져 있었을 글자와 수식들이 하얀 가루가 되어 날아간다. 가루가 되기 전의 의미들에 대해, 문득 희미한 안타까움이 스친다.

"뭐 하고 있어?" 남편이 심상하게 물어보며 다가온 건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문이 열리지 않아서 갇혀 있었어." 그는 내가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스르륵 스르륵 문은 무던히 움직였다. 그러면 뭘까. 아까 나를 들여보내 주지 않은 것은? 내 발을 베란다에 묶어두고 방안과 창밖에 오래 눈길을 두도록 한 것은?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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