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여기 보세요. 다들 올 한 해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활짝 웃으세요."
18일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공연 중인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1막 공연을 관람한 타파웨어 브랜즈 코리아 임직원 45명이 극장 로비 계단 앞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중간 휴식을 이용해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서다. 통행로임을 감안해 서로 바짝 붙어야 하는 좁은 장소였지만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의 점심 식사와 뮤지컬 낮 공연 관람으로 이어지는 송년회에 참석한 임직원들은 화기애애했다.
올해 뮤지컬계의 유례 없는 호황에는 '엘리자벳', '위키드' 등 좌석 규모 1,000석 이상 대형 공연의 잇따른 흥행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한정된 마니아가 아닌 폭넓은 관객층이 유입됐다는 이야기다. 모임이 많은 연말이 되면서 이는 '뮤지컬 송년회' 풍속도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조건 먹고 마시는 음주 위주의 모임 대신 문화 송년회를 원하는 기업 수요와 다양한 관객 기호가 반영된 뮤지컬이 늘면서 등장한 현상이다.
인터파크INT에 따르면 10매 이상 공연 티켓을 구매하는 단체 관람객이 뮤지컬을 중심으로 전년 대비 10% 가량 늘었다. 이달 초 개막한 '오페라의 유령'은 20인 이상 단체 관객이 15% 가량이며 11월에 개막한 '황태자 루돌프' 는 기업 단체 관객이 전체 매출의 25% 정도에 이른다. '황태자 루돌프'의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의 임수희 홍보팀장은 "임직원의 문화 욕구를 충족시키는 한편 구매 창출 효과를 노리는 고객 초청 행사가 늘면서 기업의 단체 티켓 구매는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비스 업종에서 주로 관심을 보였던 뮤지컬 송년회에 올해는 남성 임직원 비율이 높은 보수적 업태의 기업들도 가세하면서 대작뿐 아니라 중소형 공연에서도 회사원 관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직장생활의 에피소드를 다뤄 '오피스 뮤지컬'을 표방하는 380석 규모의 '막돼먹은 영애씨'는 11월 중순 개막 이후 관람한 1만 3,000여 관객의 60% 가량이 6명 이상 기업 단위 관객이다. 이 뮤지컬은 지난해 연말 초연 당시에도 직장인 관객의 호응도가 높았다.
이 같은 문화 송년 회식 트렌드 확산을 향한 뮤지컬계의 관심은 각별하다. 당장 티켓 판매에 도움이 되는 것 외에도 잠재 고객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매력 있는 직장인들은 회식을 통해 타의로 공연을 처음 접했더라도 관람 만족도가 높다면 언제든 자발적이고 충성도 높은 관객으로 바뀔 수 있다. '오페라의 유령'이 첫 뮤지컬 관람이라는 타파웨어 브랜즈 코리아의 김성주(46)씨는 "역동적인 송년회를 선호해 공연 관람이 마땅치 않았지만 막상 와 보니 라이브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해 가족과 함께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따라서 각 공연 제작사는 레스토랑, 술집 등과 연계한 할인 패키지 티켓을 출시하는 등 송년회 고객을 잡기 위한 마케팅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중소극장 규모의 뮤지컬은 1회를 통째로 한 기업만을 위한 송년회 맞춤형 공연으로 꾸며줄 수 있는 점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막돼먹은 영애씨'의 지난 18일 공연은 한화생명이 통째로 구매했다. 이종원 한화생명 콜센터 센터장은 "연말 행운권 추첨 이벤트 등 우리끼리 즐길 수 있는 행사와 공연을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제작사들은 문화 회식을 겨냥한 마케팅을 강화하는 추세다. CJ E&M은 내년 초에 문화 송년회용 단체 티켓을 구매한 이력이 있는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을 초청해 연간 공연 계획을 소개하는 쇼케이스를 열 계획이다. 송년회 문의가 많은 '막돼먹은 영애씨'의 경우는 올해부터 아예 문화 회식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마케팅 담당자인 '문화 코디네이터'를 새로 뒀다.
공연 칼럼니스트 조용신씨는 "장기 상연이 보편화된 뉴욕 브로드웨이의 경우 단체 세일즈를 전문으로 하는 외주 대행사가 있을 정도로 공격적인 기업 관객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며 "구매력은 있지만 공연을 많이 접하지 못한 이들 직장인 관객 집단이 뮤지컬 시장의 안정적 성장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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