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뜻’이 위험할 때도 있다
역사에 대한 공동책임 인식 가져야
선거가 끝나면 유권자의 선택은 늘 칭송을 받는다. ‘절묘한 선택’이라는 평가가 상투어가 된 지 오래다. 주권자인 국민의 뜻이 투표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런 평가에 거리낌을 갖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나 국민에 대한 불경(不敬)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동기에 떠밀린 개별 유권자의 투표 행위가 집단적 합리성을 띠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이념의 시대’가 역설적으로 낳은 몰가치적 숫자에 대한 신뢰를 들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숫자가 들어가야 미더운 세상에서 유권자 전체의 뜻이 수치로 나타난 투표 결과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덧붙여 권력에 대한 맹종 타성도 지적할 수 있다. 선거 투표는 크든 작든 권력의 탄생과 직결된다. 권력 향배와 무관한 정책의 가부를 묻는 주민투표 결과가 거의 존중되지 않는 것만 봐도 이런 짐작은 짙어진다. 나아가 국민의 뜻은 언제나 옳다는 ‘신화’에 대한 거리낌은 그것이 ‘군왕(君王)은 무결(無缺)’이라는 왕조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의 변용이라는 의심 때문이다. 주권이 군왕의 손에서 국민에게로 넘어오며 그 정당화 이데올로기도 따라왔다고 볼 만하다. 군왕이 결코 무결일 수 없듯, 주권자인 국민도 늘 옳지는 않다.
선거가 끝이라면 국민의 변덕스러움을 새삼스레 꼬집을 이유도 없다. 그러나 권력의 탄생을 부르는 선거는 본질적으로 끝이 아닌 시작이며, 바로 그 때문에 표심의 무조건적 칭송이 문제가 된다.
며칠 전 일본 총선(중의원 선거) 결과를 보며 ‘국민의 뜻’이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음을 실감했다. 선거가 시작되자마자 자민당의 승리를 예고했고, 종반전에는 일제히 압승을 예고한 여론조사 결과를 그대로 믿기 어려웠다. 지지정당이 없는 무당파층과 지지정당이나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부동층(不動層)이 50% 가깝다는 소식이 그런 의심을 더하게 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자민당이나 이시하라 신타로와 하시모토 도루의 일본유신회 등이 일본제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듯한 자극적 공약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을 보면서도, 다수 일본 국민의 무관심을 떠올리며 우려를 덜 수 있었다.
선거 결과는 경악할 만했다.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수인 241석, 모든 상임위를 장악할 수 있는 절대안정 의석 269석을 순식간에 넘어 296석을 얻었다. 일본유신회도 출범 당시의 예상에는 못 미쳤지만 46석을 얻어 65석에 그친 민주당에 이은 제3당으로 떠올랐다. 물론 이번 선거 결과를 일본 유권자가 자민당이나 일본유신회가 내건 공약, 그 중에서도 역사ㆍ영토 문제나 외교 공약에 끌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대부분의 유권자는 먹고 사는 문제라면 몰라도 외교 공약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런 공약에 끌린 유권자가 늘어난 반면, 투표로써 제지 행동에 나선 유권자가 줄었음은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자민당을 비롯한 강경 보수정당의 기를 살려준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눈길을 끄는 것은 역대 최저인 59%의 낮은 투표율이다. 이는 공명당 지지자의 몰표와 함께 자민당이 30%의 정당 지지율로 62%의 의석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 작용을 했다.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라도 도입된 이후 저질러진 역사적 과오는 늘 선거로 시작됐다. 독일의 나치가 그랬고, 일본 제국주의도 출발은 그랬다. 적극적 참여자든, 소극적 방관자든 대다수 국민은 누구나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라는 국가적 범죄에 대해 여러 일본 총리의 반성과 사죄는 있었지만, 국민적 과오는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그것이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가로막고, ‘아베형(型)’ 정치인을 배출했다. 그가 일본을 그릇된 방향으로 끌고 간다면 선거에서 그에게 힘을 몰아준 유권자와 방관자를 포함한 일본 국민 모두의 책임이다. 그런 공동책임 의식의 회복으로 우려되는 일본의 변화를 가로막을 수 있길 기대한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