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0년대 초반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학생 운동 세대에 속한다. 민주화를 위한 선배들의 긴 노력들이 역사적으로 누적되었고 여기에 우리 세대의 집요한 싸움이 더해져서 결국 군사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고백하건대, 그때 내 눈에 기성세대란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사회의 정의로운 변화에는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타락한 권력일 뿐이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었고, 그들은 견고해보였다. 우리가 버스 요금을 걱정할 때, 그들은 검은 승용차 뒤에 앉아서 돈을 세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많은 책을 읽었고, 그들은 신문 기사 몇 줄 읽을 뿐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옳은 것은 당연했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부도덕했다. 그리고 우리는 나라 전체가 요동칠 때 그 한복판에 있었고, 그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우리의 목소리가 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재라는 괴물과 싸우면서 우리 스스로 괴물이 되어 가는 모습은 한편 얼마나 흉측했던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면서 우리가 보여준 비상식과 변칙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설익은 청춘의 힘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추동시키는 가장 중요한 엔진의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은 청춘의 표정을 바꾸어 놓았다. 교수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고 노동자를 착취한다며 기업인들에 분노하던 옛 청춘들은 퇴장했고, 이제 사회적 멘토들의 엄중한 충고 혹은 따뜻한 조언을 기다리는 청춘들이 나타났다. 물론 힘들게 대학을 졸업해도 그럴싸한 일자리 하나 쉽게 얻을 수 없는 불행한 조건들 때문이다. 청춘은 더 이상 일탈과 저항의 상징이 아니라, 아픔과 준비와 학습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단기적이고도 구체적인 자기 이해에 대한 고려가 장기적이고도 추상적인 사회적 이익에 대한 숙고를 대신하는 것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현상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청년들은 도덕에 대한 비타협적 열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제고하고 자정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중요한 에너지이다. 더구나 그들 스스로 우리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들의 주장이 옳건 그르건 현실적이건 비현실적이건, 건강한 사회라면 그 요구들을 전체 사회의 조감도에 녹여 내어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맞다. 청년 세대의 젊음을 위해서 그리고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의 젊음을 위해서, 청년 세대의 지분을 지금보다 훨씬 더 확대해야 한다.
물론 청년 세대의 정치적 참여 가능성이 모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들려온 해적당의 소문, 그리고 미국에서 들려온 월스트리트 관련 시위 소식 등에 힘입어 지난 총선에서 주요 정당들은 청년들의 정치적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모색한 바 있다. 여기에 정치인 안철수의 등장은 그들의 정치적 의사와 표현이 기존 정치 영역에 건강하게 반영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들은 만족스러운 결실을 얻지 못했다. 청년 이슈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이 청년들의 걸음걸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물론 선거 때문이다. 이제 내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 여러 예측들이 난무하지만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백중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투표율이 대통령을 결정할 것이고, 여기에는 청년들의 투표율이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라는 데 대해서 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오랜만에 다시 청년들이 대통령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 운동에 의한 것도 혁명에 의한 것도 아니지만, 역사는 다시 청년들을 호출하여 다음 5년간의 대통령을 결정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이제 우리의 젊은 친구들이 나설 때다. 신분증을 들고 나가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산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산다.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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