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땐 자신이 커트 코베인인 줄 알았다. 팬들에게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는 게 재미있던 때도 있었다. '홍대 원빈'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록 밴드 위퍼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이지형(34)의 '청춘' 시절 이야기다.
토이의 히트곡 '뜨거운 안녕'을 불러 널리 알려진 이지형이 새 앨범 '청춘 마끼아또'를 들고 활동을 재개했다. 정규 앨범으론 2008년 '스펙트럼' 이후 4년 만이고, 소품 형식의 '봄의 기적' 이후 2년 9개월 만이다. 새 앨범 홍보를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지형을 12일 서울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났다. "어렸을 땐 병적으로 말이 없었다"지만 그의 말은 시종일관 전혀 막힘이 없었다.
'청춘 마끼아또'는 이지형이 자신의 청춘을 되돌아보며 만든 앨범이다. 두 장의 시디에 총 22곡을 담았다. 록 성향의 곡들이 담긴 첫 번째 시디엔 '청춘'이란 제목을 붙였고, 어쿠스틱 사운드로 채워진 두 번째 시디는 '마끼아토'로 명명했다. "사실 청춘이란 단어가 어른들이 젊은 시절을 미화하고 포장할 때 쓰는 단어 같아 싫어했고, 마키아토도 원래 뜻을 알기 전엔 설탕을 잔뜩 넣은 깊이 없는 커피 같아 싫어했어요. 그런데 두 단어의 조합은 재미있더라고요. 소리가 리드미컬해서 더 마음에 들었죠."
'개 같은 내 인생' '얼룩진 청춘'이라는 가제는 그렇게 이탈리아어로 '얼룩'이라는 뜻의 '마끼아또'를 만나 '청춘 마끼아또'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지저분한 20대에 대한 복기(復棋)다. '봄의 기적'을 낸 뒤 "음악이 너무 재미 없어지고 요령과 허세로 찌든 사람이 되는 것 같아" 1년 가까이 무작정 쉬고 놀면서 그는 20대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뜨거운 안녕' 이후 쉰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어요. 살면서 난생 처음 큰 돈도 만지게 됐고 여유도 생겼죠. 인지도는 높아만 가는데 내면의 자아는 방치돼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2010년 겨울, 모든 걸 그만두고 휴식에 들어갔어요. 가슴이 뜨거워지고 거짓이 0.1%도 없을 때 다시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조금씩 예전에 음악을 좋아했던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는 질풍노도의 20대가 지나고 난 뒤 "또 다른 성장기가 시작된 것 같다"고 했다. 30대의 가장으로서, 뮤지션으로서, 남자 이지형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찾다가 20대를 되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때마침 결혼 4년 만에 아내의 임신 소식도 들려 왔다. 이지형은 아이에게 아빠의 20대를 들려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과거를 미화하고 싶진 않았어요. 일기와 편지 등 20대의 흔적들을 다시 꺼내보니 기억과 달리 볼품이 없더군요. 그걸 그대로 가사에 담으려 했죠."
10대 이지형은 '기타 키드'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콕 박혀 기타만 쳤다. 너바나를 추종하던 그는 "국내 최고의 너바나 카피 밴드가 되겠다"는 일념 아래 고등학교 2학년 때 록 밴드 위퍼를 만들었다. 너바나의 곡만 연주하는 무명 밴드인데도 첫 공연에 100명이 넘게 모였다. 그는 "관객 반응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무대 위의 짜릿함을 처음 느꼈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홍대 인근 클럽 무대에 섰다. 국내 인디 음악이 용트림을 시작하던 1996년이었다. 당시 위퍼는 너바나 음악을 가장 비슷하게 연주하는 밴드 중 하나로 유명했다. 그는 한때 너바나의 리더였던 커트 코베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곤 했다.
"가끔 팬들이 수줍게 사인해 달라고 하면 속으로 '나는 커트 코베인인데' 하면서 '됐습니다' 하고 지나치곤 했어요. 커트 코베인에 빙의됐다고 생각하며 살았죠. 그러다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젠 이지형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었죠. 사실 커트 코베인 흉내 내며 노래할 땐 목이 늘 아팠거든요. 위퍼를 해체한 뒤 솔로 앨범을 내면서 나 자신을 찾아갔죠."
거울 속의 자신을 되찾은 이지형은 "뜨거운 순간에만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단지 돈을 위해서만 음악을 하고 싶진 않다는 뜻이다. "음악을 안 하면 숨 막혀서 못 살 것 같고 병이 날 것 같아요. 못 하겠다 싶을 때도 있지만 내버려두면 다시 뜨거운 마음이 돌아오곤 하죠. 음악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인 것 같아요. 좋은 음악을 만나면 아직도 짜릿해요. 지금은 음악을 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팔팔 끓고 있는 거죠."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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