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의료계는 유난히 시끄러웠다. 포괄수가제 시행, 의약품 편의점 판매, 천연물 신약 처방권 등 여러 문제를 놓고 의사와 약사, 한의사 등의 내부 갈등이 두드러졌고, 정부와도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다. 바라보는 국민들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묵묵히 환자를 위해 크고 작은 배려와 나눔을 실천한 의료인들이 있다. 눈 앞의 이익을 좇기보다 환자 한 사람의 마음부터 세심하게 보듬은 그들이 환자에겐 진정한 의인(醫人)이다.
구순구개열 환아가족모임 구성자신감 회복 캠프 등 지속적 성원
"민들레처럼 당당히 자라거라" 엄기일 건국대병원 성형외과 교수
20년이 다 돼 간다. 엄 교수가 자신이 수술해준 구순구개열 환아와 가족들의 모임인 '민들레회'를 만든 건 1994년이다. 당시만 해도 입술과 입천장이 갈라진 채 태어나는 구순구개열을 천형이라 여겼다. 집안에 그런 아이가 있으면 치료는커녕 숨기길 원했다. 다행히 수술을 받은 아이라도 마음의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엄 교수는 그 상처까지 치유해주고 싶었다. 민들레회를 통해 요리교실, 갯벌체험, 여름캠프 등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행사를 해마다 치렀다. "아이들에겐 무엇보다 자신감이 필요했으니까요. '당당한 아이 만들기'란 이름의 장학금도 마련해 20명 정도 지원했어요."
누구나 기부할 수 있는 모임이지만 실제 모이는 비용은 턱없이 적다. 엄 교수는 기꺼이 사재를 털었다. 그렇게 쓴 돈이 지금까지 2억원 가까이 된다. "요즘은 초음파가 발달해 구순구개열을 갖고 태어나는 아기가 많이 줄었죠. 하지만 한창 돌보고 있는 26명의 아이들을 위해 민들레회는 계속될 겁니다."
"걱정 마세요" 격려·믿음의 동영상수술대 오르는 환자들 용기백배
"주치의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삼성서울병원 수술실 간호사들
환자복 입고 수술실에 들어서면 누구나 긴장한다. 건장한 젊은 남성이 두려움에 몸을 떨기도 한다. 의료진에겐 수술이 일상 업무지만, 환자에겐 여생을 건 모험이다. 하지만 환자 대부분이 몸을 맡길 의사의 얼굴도 못 본 채 수술대에 오른다. 불안해 하는 환자를 대할 때마다 안타까웠던 간호사들은 교수들을 설득했다. 따뜻한 격려 한 마디 남겨달라고.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한 다음 수술 직전 환자들에게 스마트폰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비인후과 김효열 교수입니다. 제가 오늘 수술 진행할 텐데, 안심하고 주무시고 나면 수술은 성공적으로 돼 있을 겁니다. 믿고 파이팅 해주실 거죠?" 권위적일 거라 여겼던 의사의 세심한 배려에 환자들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실 근무 25년째라는 수술실파트장 박순애 간호사는 "저 역시 수술 받아본 경험이 있어 환자 심정을 잘 안다"며 "내년에는 더 많은 진료과가 참여하도록 독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은 이처럼 환자와 병원과의 거리를 좁히는 다양한 시도를 담은 동영상을 최근 유튜브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소외층 환우들 3년여 무료진료한의사·한의대생 든든한 지킴이로
"장애는 마음에 있습니다" 최호성 약선한의원장
한의사와 한의대생 10여명으로 이뤄진 '들풀'은 격주 일요일 오후 2시에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는 혜화독립진료소에 모인다. 이 곳에서 3년 넘게 장애인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있다. 찾아오는 환자가 마음 편히 진료받을 수 있도록 작지만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해주고 의료인 1명이 환자 1명을 30분 이상 돌본다. 침과 뜸은 물론이고 필요한 환자에게는 한약도 처방한다.
"회원들이 한 달에 10만원씩 내서 그걸로 진료 물품을 마련하고 약을 지어요. 부족한 부분은 회원들이 각자 개인적으로 지출합니다. 장애와 차별 때문에 의료에서 소외된 환자에게 최소한의 진료를 해 주고 싶어서죠."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인 최 원장은 한의원의 경영자이면서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진료 시간을 쪼개 의료 봉사를 다니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더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혼자 바득바득 돈 벌기보다 의료인 스스로 자기가 가진 걸 내려놓으면 베풀어 주는 나눔이 아니라 함께 배우는 나눔이 뭔지 깨닫게 되죠. 장애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청각장애 환자들의 입·귀 역할수화재능 통해 진료에 큰 도움
"수화로 배운 소통의 소중함" 윤수호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귀가 안 들리고 말을 못하는 한 여성이 환청과 환각 증상을 호소하며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으러 왔다. 여성의 어머니는 딸이 자신에게 화가 나 갑자기 그런 증상을 보이는 것 같다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의료진은 윤 간호사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병원에서 유일하게 국가 공인 수화 통역사 자北塚?갖고 있다.
"딸과 수화로 한참을 이야기 나눴고, 근본적인 문제는 어머니가 아니란 걸 알았죠. 그때 어머니가 보인 눈물을 잊을 수가 없네요. 실제로 청각 장애 환자는 말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의사는 보호자가 임의로 판단한 내용만 듣고 진단할 수밖에 없죠. 이럴 때 수화로 청각장애 환자들의 진심을 알게 되면 치료에도 많은 도움이 돼요." 간호대 재학 시절 호기심으로 시작한 수화는 윤 간호사와 장애 환자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 소통의 소중함을 깨달은 윤 간호사는 병원 안에 수화동아리 '빛소리회'도 만들었다. 간호사뿐 아니라 방사선사, 행정직원까지 참여한 빛소리회는 환자들의 입과 귀가 돼 주고 있다.
지방 무료순회진료버스 운행20여년간 한결같은 의료봉사
"이벤트 아닌 상시 활동으로" 전성훈 서울아산병원 사회복지팀 교수
서울아산병원은 약 20년 전부터 의료 혜택이 적은 지방을 찾아 다니는 무료순회진료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병원 직원들 고향으로 내려가 마을 어른들에게 X선 촬영, 피검사, 심전도검사 등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국 15곳에서 약 1,560명을 진료했다. 자원해서 이 버스 진료팀을 이끌고 있는 전 교수(가정의학과 전문의)는 30년 이상 감기를 달고 지냈다는 경남의 한 할머니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만성부비동염에 콧속에 큰 용종까지 보였죠. 바로 수술해야 하는데, 70세가 넘을 때까지 코막힘과 콧물을 참고 사셨던 거에요."
전 교수를 비롯한 버스 진료팀은 원내 환자를 보지 않는다. 전적으로 무료 순회 진료만 맡는 상시 조직이다. 전 교수는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환자들이 지속적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 봉사 활동 체계를 만들자는 게 이 버스 운행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병원 안에 있는 시간보다 버스로 이동하며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는 전 교수는 "우리를 기억하고 기다려주는 분들도 생겼다"며 미소 지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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